‘실습생 출신 신화’ 일군 호텔리어 1982년 8월 어느 날. 그는 이날을 잊지 못한다. 웨스틴 조선호텔의 직원모집 광고가 신문에 게재된 날이다. 그는 신문을 보자마자 ‘바로 이거다’며 무릎을 쳤다. 다른 건 몰라도 외국어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이야말로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경쟁률은 100대1로 치열했지만, 그는 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첫 번째로 맡은 직무는 프랑스 식당의 실습생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설거지와 식당청소가 고작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음식을 주방에서 손님 테이블까지 운반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일은 힘들었지만, 어느새 그의 가슴에는 ‘특급호텔의 총지배인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끔 동료들과 소주잔이라도 기울일 때면 그는 슬며시 자신의 꿈을 털어놓곤 했다. 당연하게도 그의 꿈을 귀담아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당시만 해도 특급호텔의 총지배인은 외국인 일색이었다. 그가 일했던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총지배인뿐만 아니라 부총지배인, 식음료 담당 임원, 판촉 담당 임원 등이 모두 외국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가 죽지 않았다. 아니 오기가 생겼다. 기어코 이루고 말겠다는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 꿈을 19년 만에 달성한 주인공이 이정열 롯데호텔서울 총지배인(50)이다. 실습생 출신인 그의 프로필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웨스틴조선호텔, 제주 하얏트호텔,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등을 거치며 항상 ‘한국인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웨스틴 조선호텔에서는 한국인 최초 서울 특일급 외국계 체인호텔 식음료 담당 임원을, 제주 햐얏트호텔에서는 국내 최초 웨이터 출신 총지배인(사장)을 역임했다. 세상에서 우연이란 흔치 않는 법이다. 이런 화려한 프로필 뒤에는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남다른 노력이 뒤따랐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 웨스틴 조선호텔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대우그룹이 힐튼호텔을 개관하면서 경력직원을 모집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일반직원이 아닌 ‘캡틴’으로 지원했다. 일반적으로 레스토랑의 ‘캡틴’이라는 자리는 해당 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야 오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는 호텔업계에 영어와 일어에 능한 웨이터가 없다는 점을 감안, 과감하게 ‘캡틴’직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예상대로 영어와 일어시험은 1등으로 통과했다. 그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힐튼호텔의 경영진은 그를 뽑을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외국어는 잘하지만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당시 힐튼호텔의 사장과 총지배인, 식음료 담당 임원 등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면접관들의 모든 질문을 영어와 일어로 완벽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면접관들은 이견없이 그를 ‘캡틴’으로 뽑았다. 사실 그는 영어공부를 위해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다. 포켓용 사전을 달달 외우는가 하면, 미군부대의 장교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라디오에서 AFKN을 들으며 지냈다. 냄비에 사전을 넣고 끓인 물을 마시면 단어가 잘 외어진다는 풍문을 듣고 따라하기도 했다. 그는 일식당의 ‘캡틴’이 된 지 1년 만에 다시 연회장 부매니저로 승진했다. 보통 호텔경력 15년 정도는 돼야 욕심을 내는 자리다. 그리고 1년 만에 헤드웨이터를, 또다시 1년이 지난 다음에는 연회장 60~70명의 웨이터를 거느리는 매니저가 됐다. 그의 고속승진은 멈출 줄 몰랐다. 매니저 생활 2년 만에 호텔의 전 레스토랑과 연회장을 관리하는 총괄차장 자리까지 꿰찼다. 줄줄이 선배들을 제쳤지만, 직무수행에 무리는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무슨 일로 사표를 던졌는데, 사표를 던진 지 30분 만에 25명이 따라서 사표를 낸 적이 있을 정도로 동료들의 신뢰를 얻었다. 지난 99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식음료 디렉터(이사대우)에 오른다. 당시 특급 체인호텔의 식음료 디렉터는 체인본사에서 파견했다. 세계 각국의 음식 흐름을 모르면 안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한 것 같았다”며 “그날 이후 다른 특급호텔에서도 한국인 임원이 하나둘 생겨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성공비결은 노력, 또 노력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80여개국을 다녔다. 세계 곳곳의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을 견학했다. 체인호텔에서 외국인 경영진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매너와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이나 잡지에 호텔이나 레스토랑이 소개되면 무조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예를 들면 어디 레스토랑에서 육회를 잘 한다더라, 샌드위치는 어디가 최고라더라, 또는 어느 호텔의 침대시트가 잠이 잘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직접 가서 체험해야 직성이 풀렸다. 현장에서 특이한 글라스나 칼, 침대시트 등이 눈에 띄면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오는 심정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언젠가는 홍콩의 한 호텔의 시설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은 그는 홍콩으로 날아갔다. 이틀간 숙박하면서 그는 방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천장과 바닥을 뜯어보고, 베개 안도 헤집어보고, 침대시트도 잘라봤다. 국내에 돌아온 뒤 그 호텔에서 비용청구서가 날아온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다니다보니 월급을 타도 집에 갖다 주는 돈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롯데호텔서울의 총지배인으로 현업에 복귀한 것은 조선호텔에서 손발을 맞춘 장경작 롯데호텔서울 사장의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롯데호텔서울은 현재 리노베이션을 통한 대대적인 업그레이드에 나선 상황이다. 총 937억원을 투자하는 이번 리노베이션으로 2008년까지 6성급 비즈니스호텔로 특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시설뿐만 아니라 서비스 리엔니지어링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일등 호텔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감이 넘친다. 지난해 4월 출근 첫날 호텔을 둘러본 소감은 “일하는 문화가 활기차지 않았다”는 것.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도 뛰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현장근무자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경영자다. 현장근무자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해서는 도덕성이 뛰어나고, 적극적이고, 지식으로 무장된 선배들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도 뛰자!’라는 구호를 정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를 위해 그는 몇가지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우선 직원들을 전세계로 내보내고 있다. 이벤트 담당 직원을 브라질 리오축제에 보내는가 하면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요리사들을 이탈리아로 견학 보내고 있다. 와인 레스토랑 직원들은 세계 각국의 와인산지로, 중식당 직원들은 홍콩과 중국 등으로 연수할 기회를 줬다. 호텔은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곳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호텔문화에 대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다가 인성 및 서비스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어문은 어떻게 여는지, 인사할 때 고개는 어느 정도 숙이는지 등의 기본기를 다시 한 번 가르치고 있다. 주방, 객실, 레스토랑, 판촉 등 각 분야별로 비전을 심어주는 일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이 눈앞의 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좀더 멀리 봤으면 한다. 비전을 갖고 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돈은 절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야 될 길이 결코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호텔업은 줄기세포를 만들고 인공위성을 설계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면 자연스레 최고의 호텔리어가 될 수 있다고 후배들에게 들려준다. 약력 : 1956년생. 82년 웨스틴 조선호텔 웨이터. 83~85년 서울힐튼호텔 양식당, 일식당, 중식당, 바, 연회장 지배인. 95~99년 식음총괄 차장. 99년 웨스틴 조선호텔 식음총괄 이사대우. 2000년 웨스틴 조선호텔 부총지배인. 2001년 호텔서교, 제주 하얏트호텔 총지배인(사장). 2003년 (주)아라코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본부장(부사장). 2005년 롯데호텔서울 총지배인 권오준 기자 jun@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