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서 결재를 한 건도 하지 않았다면 믿을수 있을까. 하지만 LG텔레콤 남용 사장(54)은 CEO가 된 이후 3년여 동안 실제로 그랬다. CEO로서 책임을 회피해서가 아니라 담당 임원들이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할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제가 결정하는 것보다 직원들이 스스로 결정하는게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마 제가 직접 장비를 구입한다면 담당 직원들이 하는 것보다 십중팔구 비싸게 살 겁니다" "따라서 CEO의 할 일은 '정도(正道)로 승리한다'는 믿음을 기업 문화로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만 정착되면 굳이 사장이 결정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남 사장은 결재서류를 없앤 대신 많은 일을 핸드폰으로 처리한다. 임원들은 언제 어디서든 일이 생기면 남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한다. 과장급 직원도 그에게 직접 전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같은 권한위임과 권위주의 타파의 배경에는 '사람이 제일'이라는 경영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이 쓴 '끝없는 도전'을 경영 바이블로 삼고 있습니다. 항상 가까이 두고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습니다. 특히 웰치의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경영의 제일 목표는 '사람'입니다. 강하고 지혜로운 인재를 키우는 것이 경영자의 가장 큰 덕목이자 역할입니다" 이런 이유로 남 사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스트레치(Stretch)'를 많이 시킨다. 요가나 단전호흡 등에서 쓰이는 영어단어지만 부하직원들에겐 '업무 지옥 훈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트레치'란 현 수준보다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설정해 주고 직원들이 머리를 짜내 목표를 달성토록 유도하는 것. 이를 견디지 못하면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게 남 사장의 생각이다. 그는 그러나 혹독한 훈련 과정에서 체력이 떨어지는 직원을 위해 직접 한약을 지어주며 격려하는 걸 잊지 않는다. "한 점포가 월 2백명의 가입자를 유치한다면 저는 3백명까지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합니다. 3백명 확보란 목표를 달성하면 다시 4백명을 만들도록 합니다. 이런 스트레치를 통해 직원들은 강해집니다" 남 사장은 이처럼 '극한 효율'을 추구한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좋은게 좋다'는 식보다 강도 높은 스트레치가 직원들에게도 훨씬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취임 초기 많은 불평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수년간 '스트레치' 훈련을 받으면서 이제 아무리 높은 목표를 제시해도 안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달성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직원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남 사장은 지난 1976년 LG전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85년까지 수출기획 등 해외 업무를 담당했고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89년 당시 구자경 LG 회장에 의해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오래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외국 기업의 합리성이 몸에 뱄다. 그후 LG그룹 경영혁신 업무를 맡기도 했다. 적자 투성이었던 LG전자 멀티미디어 사업본부를 흑자 반열에 올린 것은 그의 공적으로 꼽힌다. "LG전자 멀티미디어 사업본부의 '경영 언어'를 손익계산서에서 대차대조표로 바꿔 놓았습니다. 손해나 이익은 모든 직원들이 쉽게 알 수 있지만 자산과 부채 상황을 기록한 대차대조표의 경우 회계담당 부서 등 특수 계층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전 직원들이 알 수 있게 해 공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재무제표를 자신의 일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용하는 공구가 얼마짜리인지, 현재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 공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늘 생각하도록 했고 한푼이라도 아낄수 있는 개선 방안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현장 직원들은 스스로 재고를 줄이고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유휴자산을 팔아서 현금화시켰고 구매 과정에서도 한 해에 3천억원을 절약했다. 유휴 인력 정리와 공격적인 신상품 출시 등이 맞물려 만년 적자 사업부는 알짜로 바뀌었다. "현장 근로자들이 모두 해낸 일입니다. 저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근로자를 믿었을 뿐이고 이들에게 스트레치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사업부나 공장, 본사의 모든 직원들은 사실 저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남 사장은 LG텔레콤 경영을 맡은 후에도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야 했다. 그룹 차원에서 추진된 일이지만 한솔엠닷컴 인수와 비동기식 차세대 영상이동통신(IMT-2000) 사업권 획득 실패는 투자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주가 폭락과 임직원 사기저하 등을 몰고 왔다. '속을 열어보면 아마 시커멓게 탔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 고통을 참아내며 LG는 동기식 사업자로 선정됐고 이제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직원들 덕분에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는 '카이홀맨'이란 10대전용 브랜드를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이 20억원에 불과했습니다. 경쟁 기업이 2백억원을 투자해 얻은 것보다 더 큰 성과를 냈습니다" 남 사장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이동통신사업자간 접속료 조정 문제다. 접속료는 가령 019 가입자가 011 가입자에게 전화를 걸때 타 사업자 통신망을 이용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이다. 지난 2년간 선발 사업자의 원가에 맞춰서 상호 접속료를 산정한 결과 후발 사업자가 오히려 수천억원의 통화료를 선발사업자에게 퍼주는 기현상이 벌어졌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 재원으로 선발사업자는 단말기 보조금 지급과 장기가입자 할인, 멤버십 제도 등을 통해 사실상 덤핑을 했고 후발사업자의 입지를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개별 회사의 원가를 따져 접속료를 주고 받게 하면 후발 사업자의 경쟁력 강화로 공정한 경쟁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LG텔레콤은 올해 가입자 6백만명 확보를 목표로 내세웠다. 대리점에 주는 보조금이 SK텔레콤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단말기와 무선인터넷 분야 경쟁력을 바탕으로 신규가입자 시장에서 선전하면 충분히 자력갱생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 ----------------------------------------------------------------- < 약력 > 1948년 경북 울진 출생 경동고(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76년) 76년 LG전자 입사 89~93년 LG전자 회장실 이사 93~96년 LG 비전추진본부 상무 96~97년 LG 경영혁신추진본부 전무 부사장 97~98년 LG전자 멀티미디어 사업본부 부사장 98년 10월~현재 LG텔레콤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