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제조업체인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40)은 말단사원 시절부터 '통이 크다'는 말을 듣곤 했다.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크게 도모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작년 말 휴대큐리텔 인수 직전에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인수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큐리텔을 인수해 일등기업으로 바꿔 놓으려면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걸자'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그는 회사 돈 대신 '개인 돈'을 털어 현대큐리텔을 인수했다. 박 부회장은 서울 서초동 현대큐리텔 대표이사 집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내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얘기했다. 그는 "뭐가 아쉬워 그런 모험을 택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경영이란 대충 해가지곤 안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처음부터 다시 뛰고 싶었고 기어이 일등을 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박 부회장의 결심은 현대큐리텔 임직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작용했다. 박 부회장은 큐리텔을 인수해 공동대표로 취임한 후 임직원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술자리에서 임직원들의 상한 자존심을 달랬고 "합심해서 일등기업을 만들자"며 건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큐리텔과 박 부회장과 팬택은 금새 한 식구가 됐다. 그는 "큐리텔 업무를 파악하고 조직을 장악하는데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팬택 오너인 박 부회장의 큐리텔 인수는 사실상 큐리텔과 팬택의 결합을 의미한다. 큐리텔은 든든한 '동료'를 얻어 힘이 솟았던지 새 주인을 맞자마자 초대형 상담을 성사시켰다. 지난달 미국 오디오박스로부터 휴대폰 5백만대를 수주했던 것. 이는 단일 물량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며 금액으로 약 1조원에 달한다. 박 부회장은 "오디오박스측이 3백만대만 사가겠다고 하길래 '최소한 5백만대를 사가라'고 졸라 오케이를 받아냈다"고 설명했다. 큐리텔 임직원들은 5백만대 수주를 계기로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았다. 팬택 근로자들도 이름 없는 중견 메이커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을 좌우하는 메이저로 도약하게 됐다며 반기고 있다. 큐리텔과 팬택은 지금 일등기업 도약을 위한 장기 플랜을 짜고 있다. 박 부회장은 "덩치만 큰 기업이 아니라 기술중심회사, 기술일등회사를 만드는 것이 기본방향"이라고 설명했다. 또 "두 회사를 합병하지 않고도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이 단단히 각오하고 승부를 걸었던 것은 비단 큐리텔 인수건만이 아니다. 11년전인 지난 91년에는 벤처기업 팬택을 설립해 삼성전자와 금성사에 정면으로 맞섰고 98년에는 세계 2위의 휴대폰 메이커인 미국 모토로라를 설득해 팬택에 투자하게 했다. 특히 팬택을 설립할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는 당시 맥슨전자 국내영업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사원이었다. 그러나 보장된 장래를 마다하고 자신의 10평 연립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팬택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무선호출기(일명 삐삐)를 만들어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에 맞서 싸웠다. 다행히 팬택이 만든 무선호출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기술로 승부를 걸어 가장 작고 성능이 좋은 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박 부회장은 무선호출기 인기가 절정에 달할 무렵 주력품목을 휴대폰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팬택의 휴대폰은 무선호출기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자 모토로라가 '구미가 당길 만한 거액'을 제시하며 팬택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박 부회장은 제의를 거절했다. 그 대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팬택에 투자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모토로라는 팬택에 투자했고 팬택은 모토로라 유통망을 활용,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게 됐다. 박 부회장은 "그때 팬택을 모토로라한테 팔았더라면 꽤 큰 돈을 손에 넣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기업을 경영하고 싶었고 애써 키운 기업을 외국기업한테 넘기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박 부회장은 남다른 친화력을 갖고 있고 경영에서는 유난히 인재를 중시한다. 주위에선 그를 "누구든지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화가 시작되면 걸쭉한 재담으로 좌중을 휘업잡고 죽이 맞으면 스스럼없이 "형님" "동생"이라 부른다. 또 인재를 만나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하지 않는다. LG전자 출신 박정대 사장(큐리텔.팬택 계열 대표), 삼성전자 출신 이성규 사장(팬택 대표) 등을 이런 식으로 영입했다. 박 부회장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믿고 일을 맡긴다. 그는 큐리텔 송문섭 사장을 "깜짝 놀랄 만한 실력을 갖춘 스탠포드 박사"라고 평했고 팬택 이성규 사장에 대해서는 "발군의 실력자", "기술에 관한한 당대 최고"란 표현을 썼? 자신에 대해서는 "아둔하고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다만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줄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이들이 실력을 발휘하게 하는 재주를 조금 갖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박 부회장은 인터뷰를 끝내고 기자가 취재수첩을 덮자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고 하더니 "다시 태어난다면 기업 경영 안하고 경쟁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광현 기자 khkim@hankyung.com ----------------------------------------------------------------- < 약력 > 196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 중동고 호서대 경영학과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재학중) 1987년 맥슨전자 입사 1991년 (주)팬택 설립(대표이사) 2001년 11월 무역의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2001년 12월 현대큐리텔 인수(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