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호 < 울산대 석좌교수 / 경제학 > 태풍이 연이어 한반도를 강타했던 2∼3년 전 일이다. 피해가 크게 보도된 신문을 읽고 있는데 한 교수가 들렀다. "…너무 걱정 마세요. 태풍은 적조현상은 물론 해안오염을 깨끗이 제거할 것이므로 국가 전체적으로는 득이 실보다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미국의 테러 대참사를 보면서 문득 그 교수의 얘기가 상기됐고,이 대참사의 경제적 득과 실은 무엇이며 또 태풍처럼 일과성적 성격으로 볼 수 있을지 자문했다. 혹자는 '파괴는 새로운 건설을 창조한다'며 일본 오사카 대지진을 예로 든다. 또 불행은 시민의 단결을 초래할 것이며 방위산업을 위시한 정부지출의 확대를 쉽게 해 경기부양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선진제국이 경제정책의 협조를 강화할 것이며,금리인하와 유동성 확보를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이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테러 대참사가 가져 올 경기회복적이며 긍정적 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안정을 바라는 차원에선 충분히 수긍할 수 있고 또 태풍이나 지진처럼 일과성적 성격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이번 대참사의 여파가 단기간에 끝날 것으론 보이지 않으며,오히려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경제행태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기대와 심리적 작용이다. 대참사의 여파로 생긴 중동의 전운이 지속되면 일반시민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시민의 불안감이 지속되면 투자는 지연될 것이며,소비는 위축될 것이고,주가는 하락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현행 불황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적으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황의 장기화에 대비하는데 온 국민의 관심이 집결돼야 한다. 정부는 추경편성,금리인하,유동성 보장,규제완화 등 경기부양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당연하고 또 올바른 대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정·금융의 확대정책을 강화한다고 해서 우리경제가 회복되리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약을 먹으면 1주일만에,휴식하면서 원기를 회복하면 7일만에 감기는 좋아질 겁니다"라고 말한 의사의 얘기가 기억난다.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기껏 감기약에 비유된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문제는 재정·금융의 한계를 훨씬 초월한 것이며,기업 금융 노동에 걸친 전반적·총체적인 취약구조 및 도덕적 해이와 깊이 연관돼 있다. 정부만 탓할 성격이 아니다. 위기는 기회를 만든다 했다. 이 대참사를 계기로 각 단위가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성해야 하며,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응집력을 키워야 한다. 정계는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기업은 투명한 경영으로 근로자가 동참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금융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건전성을 회복해야 한다. 노사관계는 당사자주의 원칙에서 단위별 공생의 길을 열어야 하며,정부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일에만 충실해야 한다. 공무원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이라는 긍지로 변화된 새로운 여건에서 개혁을 솔선수범해야 한다. 민주사회는 복수사회이며 다원적 가치의 존중에 기초하고 있는 역할사회이다. 잘못된 것은 선조 탓이라는 식의 책임전가 문화는 단절돼야 한다.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불황의 장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위기의식으로 경제·사회의 각 단위에서 군살을 빼고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함께 노력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이러한 미시적 접근만이 우리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기술혁신이나 경영혁신도 과학자나 전문인에 의해서만 결실된 것은 아니다.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열의와 동기가 있으면 기능공이나 일반직원에 의해서도 업무개선과 혁신은 창조됐다. 현행 불황이 장기화되고 또 위기로 발전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는 없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연구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미시적 단위에서 함께 연구하고 해결하려는 역할사회와 학습사회의 구축은 좋은 단기적 경기대책이 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정보·지식사회에 대비하는 최선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