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한 나라의 법률이나 규정, 또는 국제협약이나 합의에 의해 많은
일들이 지배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국의 정부나 국제규약과는 상관없이 시장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표준, 이른바 디팩토 스탠더드(defacto standard)가 판을 치고
있다.

정부보다는 시장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디팩토 스탠더드는 시장에 의해 형성된다.

VTR에 있어서 VHS방식이 베타방식과 싸워서 사실상의 표준이 된 것이
좋은 예이다.

처음에는 베타방식이 오히려 우세했다.

비디오 테이프도 훨씬 많았다.

하지만 베타방식은 소유업체의 욕심이 지나쳐 특허를 다른 업체에
공개하지 않고 독점했던 것이 큰 실책이었다.

약세에 머물러 있던 VHS진영이 특허를 공개하자 VTR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많은 업체들이 이에 가담했다.

패밀리가 계속 불어난 것이다.

그러자 VHS방식의 비디오 테이프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포지티브 피드백이 가속되자 결국에는 VHS가 디팩토
스탠더드가 되는 자기조직적인 프로세스를 낳은 것이다.

이것은 시장에서의 정보공유에 의해 소비자사이에 공명이 생긴 결과이며
히트상품의 출현도 같은 프로세스이다.

가령 베스트셀러만 해도 그런 과정이다.

서평난의 좋은 평가를 보고 많은 서점들이 책을 주문한다.

그러면 많은 독자들이 책을 산다.

유명서점의 판매부수 베스트10 랭킹에 오른다.

더 많은 독자들이 책을 산다.

이렇게 해서 밀리언셀러가 탄생한다.

요즘은 국제금융계의 디팩토 스탠더드가 문제다.

무디스나 S&P 등 신용평가기관들이 사실상의 표준이 되어 상대방 국가나
국제기구보다도 더 무서운 역할을 한다.

이들 기관이 혹독한 평가를 내리면 한 나라의 금융계가 박살이 난다.

군대보다도 방어하기가 더 어렵다.

세계의 많은 일들은 이제 정부조직보다는 비정부적인 디팩토 스탠더드가
관할하는 권력이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S&P에 이어 영국의 피치IBCA사가 한국의 신용평가를 "긍정적"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것이 뉴욕의 외채협상에 잘 반영되었으면 좋겠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