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모입시학원에서 대입준비를 하고 있는 김영철(23)씨.

그는 공고졸업후 4년간 다니던 회사를 최근 미련없이 그만뒀다.

입사 초기만해도 김씨는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고 남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김씨는 날이 갈수록 생산직이 갖는 한계를 피부로 느끼게
됐다.

승진이 늦어질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사회적 신분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생산직에 회의를 갖게 됐다.

결국 사회적으로 좀더 인정받는 직장을 찾는 방안으로 만학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김씨에게 1류 기능인의 꿈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기능천시풍조다.

기업의 직위구조에서도 기능인력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국내기업의 직제는 대개 관리직과 생산직으로 나뉘어 있다.

관리직의 직급은 사원 대리 과장 등 7~8개로 세분화돼 있다.

생산직은 사원 조장 반장 직장 등 서너단계에 불과하다.

직급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승진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승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예로부터 "낮은 대접"을
받아왔다.

"사농공상"이란 말에서 드러나듯 기능인은 전통적으로 뒷전에 밀렸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실업계 학교 현황만 봐도 그렇다.

한국의 실업계 고등학교 비중은 40%선이다.

독일 등 선진국의 70~80%에 훨씬 못미친다.

그나마 실업계 고등학교의 진학률은 거의 매년 "미달"이다.

청소년들이 1백% 취직이 보장되는 기능인보다 실업의 위험을 안고 있는
대학졸업자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인력난으로 공고출신이면 "귀하신 몸"이 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사회의 기능인력 천시현상이 어느정도
깊은지 확실히 엿볼수 있다.

노동부 유필우 직업능력개발심의관은 "우리나라에서는 학력이 신분
계급을 상징하는 요소가 되어 왔다.

많은사람들이 인문계고등학교와 대학에 들어가려는 것도 바로 이같은
풍토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작업복보다는 넥타이를 맨사람을 한수위로 보는 "펜대
우월의식"이 잔존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학사모 선호 증후군"은 산업현장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뿐
아니라 기능인력 양성을 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생산기술연구원에 딸린 산업기술교육센터와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중소기업연수원 전문기술인력양성과정의 올해 졸업생수는 각각
1백81명과 4백50명이다.

고급 기능인력 전문육성기관으로 전문학교와 같이 2년제로 운영되는
이들기관의 지난 95년 입학생수는 각각 3백80명과 8백50명.

절반 가량이 교육을 받다가 중간에 그만뒀다는 얘기가 된다.

중진공 어치선 연수원장은 "학생들이 번듯한 대학 졸업장 없이는
기업에서 찬밥대우를 받는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전문학교등으로 옮기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능력보다는 학력을 더 알아주는 사회풍토는 국내기업의 인력난과
함께 고용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대졸자들의 취업난은 심화되고 있으나 제조업체의 기능인력 부족률은
15.02% (통계청 고용전망보고서)에 이를 만큼 인력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청소년들 대부분이 인문계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고 기능인력을
양성하는 실업계고등학교진학을 기피하는 것이 주요인중의 하나다.

이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다.

"한국경제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학력보다는 능력을 우선하는 풍토가
조성되야 합니다.

기름밥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양질의 노동력이 창출되는 게
아니겠어요" (H전자 이영철반장).

팔리는 제품을 만들려면 대학 졸업생만 양산해낼 게 아니라 생산현장
근로자들을 양성하고 그들을 아껴줘야 한다는 말이다.

< 조주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