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의 눈과 귀가 또 한번 서울의 연희동에 쏠렸었다.

7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뒷맛은 다르다.

엄동을 앞두고 깊은 산속 사찰로 유배를 떠나던 때의 극적인 모습과 감동
을 연출할 생각이었다면 그건 또 한번의 중대한 오산이었다고 해야 한다.

노태우 전대통령이 27일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발표한 대 국민성명의
내용은 한마디로 실망적이다.

그건 해명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다.

그는 또 한번 국민을 실망시켰다.

이날 성명은 뭔가 속시원한 해명을 기대했던 국민에게 더 많은 의문과
의혹,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던져주었다.

재임 기간중 "약5,000억원"을 조성했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4,000억원 비자금설이 진실임을 확인해준 것일 뿐 새로울 게 없다.

또 퇴임때 쓰고 남은 돈 "1,700억가량"도 지난 19일 300억원으로부터 출발
해서 485억원, 990억원등 양파껍질 벗겨지듯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불어나온
현실에 비추어 놀랄만한 게 못된다.

규모도 중요하지만 궁금한 것은 그런 엄청난 돈을 어떤 방법 어떤 명분으로
조성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무슨 용도로 얼마를 썼느냐다.

기업인의 성금으로 조성했다든지, 정당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썼다는 설명
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뭔가를 숨겨놓고 여론의 향배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려는것 같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성명내용만 봐서 또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국민
앞에 사죄한것으로 믿기지 않는다.

그는 이 돈을 가리켜 시종 "통치자금"이란 표현을 썼으며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관행화된 돈이고 심지어 불가피하기까지 했다면서 변명에 더 무게를
실으려는 인상이었다.

더욱이 그는 지금은 얼마나 되는 "통치자금"이 남아 있는지, 남은 돈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뭔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같아 씁쓸하다.

결국 노씨의 이날 성명은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는
것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해명은 커녕 오히려 궁금증을 더하게 만들었고 진솔한 사죄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다.

날로 증폭되는 비난여론과 수사강도에 쫓겨 발표를 서두른 느낌이다.

검찰은 이제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성명이 가려주지 못한 많은 의혹과
의문을 규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출석조사를 받겠고 어떤 심판, 처벌, 돌팔매도 감수하겠다고
한 이상 진실규명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뒤처리는 먼저 진실을 규명한 뒤에 생각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결코 정치적 흥정이 사전사후 막전막후에 있어서는 안되며
법에 따른 심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집권말기에 여.야당에 대선자금 등의 지원내역도 만약 그런게 있었다면
밝혀야 한다.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정치인의 도덕성을 확보하고 이번 일과 같은 국가적
으로 수치스런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진상을 밝혀 단절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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