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의 행동미학 속에는 없었던 극단적인 행동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자살"이 그것이다. 일본인의 전통
속에는 할복 자살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어 패배를 인정한 무사들이
자살을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자발적이든 타의적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인내와 끈기,울분을 속으로
삼키는 "한"의 미학이 있어왔다고 내심 생각해본다. 그러나 정말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행동미학은 변하고 있다. 삶도 죽음도 조급히 서두는
느낌이다.

부도를 낸 중소기업 사장들이 잇달아 자살을 한다. 물론 그 속사정은
죽는게 나을 만큼 다급했으리라.

입학 시험에 떨어진 학생이 자살을 한다. 슬롯머신에 빠졌다가 파산한
젊은이가 자살을 한다.

유서 쓰기가 무슨 유행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혼자 죽어버리면 다 해결이
난다는 듯이,그렇게 자살을 한다.

심지어 범죄현상을 봐도 그렇다. 예전에 우리 사회의 범죄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남의 돈을 훔치거나 강도 살인을 저지르는 단순 범죄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혀를 자른다든지 하는 요즘의 병적인 범죄현상은 일종의 사회
신경 불안 증세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사회는 이제 간염이나 심장병 위장병이 아닌 신경증을 앓고
있는듯 보인다. 얼핏 이것은 선진국형 증세로 보일는지 모르나 그에 비해
우리사회의 위나 간이나 심장이 아직은 그리 튼튼한 것 같지도 않다.

물론 광주사태는 그것에 연루된 몇사람을 처벌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난일을 속속들이 파헤쳐 모두 원수를 갚아야할 일도
아닌것 같다. 어쩌면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은혜를 갚을줄 알듯 원수를
갚을줄 아는데 있는 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죽어서 저승에 가면 전생의 한을 잊도록 망각주를 준다고
한다.

다음 생에 원수 갚는 일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삶이란 어차피 한낱
꿈이라,그것이 두시간 짜리 지독한 악몽이라한들 모두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동양의 불교가 망각을 권유한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마저 내주라"고
말한다. 얼핏 이말은 인도의 간디가 말한 "비폭력,무저항"의 정신과
통하는 바 있다. 그러나 "비폭력,무저항"과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적극적인 행동의 정신이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제대로 지켜지지는 못할 것이다.

굳이 종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시간 마음을 좀 다스릴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불행했던 폭력의 시간들이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란과 번잡의 시대를 벗어나 평화의 시대를 누릴 때가
아닌가. 우리는 그때 그시간 아프게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수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 상처를 달래고 약을 발라 과거 퇴행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으로
보상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사태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그때는 그럴수 밖에
없었다든지,내가 무슨 죄가 있나,하라는대로 했을 뿐인데 식의 변명이
아니라 아주 작은 풀뿌리 하나라도 짓밟은 그런 기억들에 대해 깊은
죄의식을 지녀야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그들은 나치 전범과 유태인의 관계,일제 침략군과
한민족의 관계가 아니라 피를 나눈 동포인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들 폭력의 시대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거듭 악순환을
되풀이해 오지 않았는가.

개인의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듯이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더욱 미래지향적인 곳으로
쏟아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대화를 통해 원수 갚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바꾸어줄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유능한 정신과의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그 의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하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