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인터뷰 - 소설가 이문열

타고난 이야기꾼, 다시 시대를 말하다

586의 타락과 권력 집착 다루고 싶어
처음엔 순수하고 애국적이었을지 몰라도
친북 주사파 등장 이후 변질되기 시작
권력 잡은 뒤엔 위선과 독선으로 치달아
12권짜리 《변경》급 대하 소설로 구상

대담 = 조일훈 논설실장
이문열 선생이 지난 12일 경기 이천 부악문원에서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이문열 선생이 지난 12일 경기 이천 부악문원에서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한 시대를 상징하는 문인들이 있다. 소설가 이문열 선생이 그렇다. 1980~1990년대 그의 글은 천부적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듣게 했던 절묘한 상상력과 신산스러운 성장기를 자양분 삼아 수련한 문장력을 앞세워 현실과 픽션을 종횡무진했다. 냉전적 격돌과 속물적 세계관이 폭주하던 개발경제시대, 사농공상의 구질서가 근대적 산업화와 도시화로 넘어가던 시대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탐색하면서 세상이 아름다운 이상의 불꽃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아쉬움과 통찰을 버무려냈다. 사회주의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영웅시대》(1984)로 우리 사회의 치열한 이념 갈등을 직시한 데 이어 1987년엔 호헌조치가 나오자 권력과 대중의 속성에 대한 우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한 달여 만에 내놓으며 한국 지성계를 놀라게 했다. 논란의 대상이 된 작품조차 거대한 물줄기의 증거가 됐다. 여성주의 운동이 들썩거리던 1997년, 조선시대 현모양처를 화자로 내세운 《선택》으로 논쟁의 한가운데 섰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자신의 시대를 직접 갈무리하는 중이다. 그간 발표한 작품 중 약 90권을 추려 재출간하고 있다. 낮의 정원에서는 웃자란 나뭇가지를 쳐내고 밤의 서재에서는 문장을 솎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그의 창작공간인 경기 이천의 부악문원을 찾게 된 것은 출세작이자 영원한 베스트셀러 《사람의 아들》의 다섯 번째 개정신판 서문을 보고서였다. “이번 살이(生)의 마지막일 듯싶은…”이라고 시작하는 글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선생의 연세도 벌써 일흔넷이다. 취재진을 맞으면서도 “이제 나의 생각과 의견은 변변찮아졌고 몸도 너무 늙어버렸다. 아마 오늘이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가차없이 흐르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소설가의 속도 모르고 봄을 맞은 뜰에는 철쭉, 붓꽃, 수국이 한창이었다. 천장 끝까지 책이 들어찬 서재에도 봄볕이 쏟아졌다.
이문열 선생과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이 부악문원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범준 기자

이문열 선생과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이 부악문원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범준 기자

▷재출간 작업은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그간 민음사에서 낸 작품 약 90권을 2019년부터 다시 손봐서 알에이치코리아(RHK) 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정판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립디다. 이제 거의 다 했습니다. 지난해 대하소설 《변경》 총 12권을 재출간했고, 이제 《영웅시대》 상·하권이 남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없습니까.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작품을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정의, 내가 지닌 철학을 갖고 썼습니다. 당대 유행과는 거리를 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한 스무 권 정도 소설을 더 쓰고 싶은데, 그걸 못 이루면 죽으면서 ‘이거 참 분하다!’ 외칠 거 같기는 합니다.”(웃음)

▷신작을 내놓으신 지가 5년이 지났습니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계시는지요.

“1980년대를 정면으로 증언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이 이뤄진 시기잖아요. 전두환 독재의 시절이기도 했지만 순수 민주화운동에 친북 주사파가 본격적으로 끼어든 시대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른바 의식화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시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어떤 세력이 의도를 갖고 정교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인 만큼 《변경》 정도의 사이즈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문학적으로 586을 비판하는 작품이 되겠군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는데, 1980년대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아닌가요.

“지금 세상을 80년대 학번들이 주무르고 있으니까요. 문재인 정부 5년을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운동권 출신이었잖아요. 한때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는 이유만으로 40년을 큰소리치고 권력까지 거머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잡고 난 뒤에 보여준 그들의 위선과 독선은 실망스럽다기보다 너무 무섭고 기이해요. 원래 괴물이었던 건지, 아니면 괴물로 변해간 것인지, 권력 앞에 인간성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 것인지 등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음 아닐까요.”

▷좌파 진영이 이 선생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가 있군요.

“보수꼴통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죠. 내가 그렇다고 좌파들과 치고 받고 싸운 적은 없지 않습니까. 깃발 들고 우파가 되기를 강요한 적도 없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사뭇 내가 좌파인 줄 알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들소》에서 마르크스는 하나도 언급 안 하면서 ‘잉여’와 ‘계급’의 탄생에 대해 기가 막히게 써놨다고요.”(웃음)

▷1980년대 발표한 작품들도 유난히 이념 문제를 많이 다룬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내 환경이 자극한 부분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월북한 뒤, 나는 끊임없이 우와 좌를 비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장 보러 간 어머니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돌아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경찰이 미행 붙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죠. 숱하게 이사도 다녔습니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낯선 동네에서 한 2년 자유롭게 지내다 보면 경찰이 찾아왔죠. 1968년 주민등록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잠깐의 자유를 누리려 2~3년씩 동네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생이별한 남편을 마음 놓고 그리워하지도 못했습니다. ‘영감 다시 내려오면 우야노’ 하고 맨날 걱정하셨죠. 식구들 전체가 간첩으로 몰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함은 ‘이열(李烈)’이라고 들었습니다.

“작가로 등단하면서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쓴 것도 본래 이름을 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외자로, 이열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하 활동을 하다가 그만 잡혀 들어갔어요. 몇 개월 유치장에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 배를 쓸면서 ‘너는 배 속부터 싸웠으니 열렬한 사회주의 투사가 돼라’ 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동아일보 등단 때부터 이름 가운데 ‘글월 문(文)’ 자를 넣었습니다.”

이 선생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월북했다. 그해 그의 어머니는 세 살이었던 그를 데리고 고향인 경북 영양 두들마을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월북 또는 공산주의 활동, 그로 인해 숨죽이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의 소설 《변경》 《타오르는 추억》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소재다.

▷우파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우파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간의 여러 가치 중에 자유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좌파는 평등을 우선시하고요. 제가 동의하기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건 좌파가 주창하는 평등이 전체주의, 집단주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전력 질주 달리기도 있고, 산책도 있고, 모두가 똑같이 이인삼각처럼 발 맞춰서 가는 것도 제각기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좌파의 어떤 점이 전체주의 우려를 자아냈습니까.

“전 국민에게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주는 장면을 볼 때가 그랬습니다. 저처럼 당장 긴급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일괄적으로 돈을 쥐여줬죠. 그 돈은 평등에 대한 질 낮은 아첨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주체를 달리하는 정부를 열 번 이상 경험해봤는데, 아무 대가도 노력도 없이 국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공돈’을 받는 일이 문 정부에서 제일 많았습니다.”

▷최근 김지하 등 동료 문인들의 부고가 잇달아 들려왔습니다. 생전에 왕래는 있으셨나요.

“김지하 선생과는 좋은 추억이 많습니다. 내가 대구 살 때 김 선생이 찾아와 술도 마시고 직접 난을 쳐서 일명 ‘지하난’도 선물해주셨죠. 어느 날은 진보 문인들과 술을 먹다가 시비가 붙었어요. 그때 김 선생이 ‘너네 이문열 말 잘 들어라. 쟤 말 안 듣고 느그들끼리 운동하면 망한다’ 하면서 나 대신 싸움을 붙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요 며칠 몸이 안 좋아서 무심하게 문상도 못 간 게 계속 후회스럽습니다만….”

떠나버린 동료 문인들을 추억하듯 서재 테이블 위에는 보라색 해당화 세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이 선생의 고향인 영양에서 자라는 꽃이다. 고향에서 몇 그루 얻어다가 부악문원 뜰에 심어뒀다고 했다. 해당화가 한창일 그의 고향에는 문학관이 지어지는 중이다. 살아서 자신의 문학관을 갖는 영광을 누리는 문인은 흔치 않다.

▷영양의 문학관 건립은 어떻게 돼갑니까.

“당초 올해 6월 말쯤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좀 늦어져 아마 8~9월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전시 공간뿐 아니라 도서관도 마련합니다. 제가 갖고 있던 책들도 있고, 우리 또래 교수들이 살림을 정리할 때 남는 책을 받아둔 것까지 해서 1만 권 정도 장서를 갖춰 손님들을 맞으려고 합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젊어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관심 없다. 명예인들 영광인들 죽은 내게는 무슨 위로가 되겠나’ 하고 허무주의적인 답을 했었습니다. 여전히 죽은 뒤의 영광을 탐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문학의 기능이 있을 텐데, 그 역할을 제일 잘 수행한 작가라고 정의된다면 참 좋겠지요.”

▷선생께서 생각하는 문학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작가가 가장 많이 생각하면서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떨 때는 허망한 유희 같기도 하고, 그래도 사람의 말이니 새가 울고 개가 짖는 것보다는 울림을 줬으면 하기도 하고….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살아 있는 내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요. 각자가 정의하는 문학의 기능이 무엇이든 ‘그래도 문학의 존재 의미를 보여준 작가였다’ 이렇게 기억됐으면….”

■ 이문열은…

△1948년 서울 출생, 본명 이열(李烈)
△서울대 국어교육과 중퇴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입선(‘나자레를 아십니까’)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새하곡’)
△1979년 오늘의 작가상(‘사람의 아들’), 1982년 동인문학상(‘금시조’), 1984년 중앙문화대상(‘영웅시대’), 1987년 이상문학상(‘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다수의 문학상 수상 △1998년~현재 부악문원 대표
△2015년 은관문화훈장
△2016~2018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


정리=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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