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정희 기자
그래픽=이정희 기자
“이태백은 마음이 흔들리면 술을 한잔 했다지만, 나는 흔들리면 차(茶)를 마신다. 누군가가 나를 절망하게 할 때, 내가 낡아간다고 생각될 때, 차를 마시면 그 슬픔과 우울에서 깨어난다.”

소설가 해산(海山) 한승원 씨는 저서 《차 한잔의 깨달음》에서 “차는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깨달음을 낳는 자궁은 된다”고 적었다. 찻잔을 앞에 놓고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면 번잡스러움과 탐욕, 허영과 교만이 어느새 사라지고 고요한 내면의 우주로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색과 향, 맛 세 가지를 두루 즐길 수 있는 차는 건강 음료일 뿐 아니라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도구다. 차는 겨우내 긴 추위를 견뎌내며 아래로 곧게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자란 어린 찻잎을 따서 찌고 말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다시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러나 거기엔 햇살과 비바람, 흙의 기운 그리고 찻잎을 딴 사람의 땀이 모두 담겨 있다. 한 잔의 차에 온 우주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하는 이유다.

이런 연유로 차는 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받아왔다. 동양의 문인들은 술 대신 차를 마시며 세속적인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연과의 일체를 꿈꿨다. 서양에서는 차를 ‘동양의 신비’로 여기며 ‘애프터눈 티’라는 고유의 문화로 발전시켰다.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해온 차가 최근 국내에서도 저변을 넓히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차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2030세대의 프리미엄 차 구매는 전년 동기 대비 50%가량 증가했다. ‘집콕’ 생활이 이어지면서 혼자 즐길 만한 새로운 취미를 찾는 이들에게 찰나의 ‘티 타임’이 새로운 위안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차와 어울리는 음식을 페어링해 함께 즐기는 티 오마카세 전문점, 티 소믈리에가 블렌딩한 차를 맛볼 수 있는 티 전문 카페 등이 늘고 있다.

심외무차(心外無茶: 마음을 떠난 차는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꼭 ‘다도’를 지켜가며 어려운 마음으로 차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열심히 달려온 하루를 위안하고,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흘려보낼 수 있다면 형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테다. 모락모락 김을 내뱉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마음속 일렁이던 파도를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

정소람/김진원/이수빈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