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봉준호·룰루 왕 이어 올해 클로이 자오·정이삭

15일 발표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중 돋보이는 건 단연 클로이 자오와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다.

중국 출신의 젊은 감독인 자오(39)는 '노매드랜드'로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부터 독보적인 수상 기록을 써왔고,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43) 감독의 영화 '미나리'도 '노매드랜드'와 함께 작품상과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최대 경쟁작이 됐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해와 비슷한 양상이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서 시작해 아카데미 4관왕까지 세계 영화사를 다시 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있었고, 중국계 미국인 룰루 왕(38) 감독의 '페어웰'이 또 다른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할리우드서 확산하는 '아시안 웨이브'

◇ 미국 이민 2세 아시안 감독의 목소리
미국 이민 2세인 젊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든 '미나리'와 '페어웰'은 미국 대표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호평받았다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페어웰'은 지난해 '기생충'이 최우수국제영화상을 받은 독립영화 시상식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받았고, '미나리'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하루 전날 열리는 어워즈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페어웰'에서 주인공 빌리를 연기한 중국·한국계 미국 배우 아콰피나(33)가 골든글로브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뮤지컬·코미디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미나리'의 윤여정(74)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임에도 중국어가 50% 이상이라는 이유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페어웰'은 1년 뒤 '미나리'가 같은 상황에 놓이자 룰루 왕 감독이 공개적으로 골든글로브를 비판하며 '미나리'를 지지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서 확산하는 '아시안 웨이브'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남부 아칸소주에 정착하려는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페어웰'은 중국 고향에 남은 할머니의 병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에 흩어져 사는 자식 가족들이 모이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이삭 감독은 오래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고, 룰루 왕 감독은 불과 몇 년 전에 겪은 일을 생생하게 그렸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 시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민 1세대 부모와 달리 아주 어린 시절에 이주한 2세대 감독들이 만든 이야기는 결국 세대 간 갈등과 이해로 모아지고 그 중심에는 가족애가 있다.

영화에서 이민 가정이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과 세대 간 격차로 인한 갈등이 두드러지는 건 '페어웰'이지만, 이민 2세인 '미나리'의 정 감독과 주연 배우 스티븐 연은 영화를 통해 앞선 세대를 이해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예고편만 보고도 너무 울어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며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이주를 결정한 1세대와 달리,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한이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서 확산하는 '아시안 웨이브'

앞서 아콰피나가 '페어웰'의 진중한 빌리와는 달리 개성 넘치는 부잣집 딸로 등장했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이 아시안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목받았다.

이 영화 역시 싱가포르 출신 화교 소설가 케빈 콴(48)이 2013년 내놓은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중국계 미국인 감독 존 추(42)가 연출했다.

중국계 미국인 주인공 레이철(콘스탄스 우)은 미국 유명 대학의 최연소 교수지만, 싱가포르 최고 갑부인 남자친구의 어머니로부터 가난한 이민자 가정 2세이자 '정체성이 모호한 미국인'으로 백안시당한다.

싱가포르의 손꼽을 만한 최고 부유층 사람들이 등장하며 화려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조이 럭 클럽'(1993) 이후 25년 만에 아시안 배우들만 캐스팅해 만든 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백인 일색의 할리우드에 다양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할리우드서 확산하는 '아시안 웨이브'

◇ 독보적인 존재감…클로이 자오
이날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편집상 등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린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은 지난해의 봉준호 감독만큼이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을 "반항적이고 학업에는 게으른 10대"였다고 표현했고, 결국 영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국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예술 학교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뉴욕대 티시 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2015년 첫 장편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후보에 오르며 단번에 주목받았다.

세 번째 영화인 '노매드랜드'는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최근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4관왕까지 총 194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여성 감독이 황금사자상을 받은 건 역대 두 번째, 골든글로브에서 아시아계 여성 감독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것은 최초다.

자오 감독 개인이 감독과 각색, 편집으로 받은 상만 78개다.

붕괴한 기업 도시에 살던 여성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이 보통의 삶을 뒤로한 채 홀로 밴을 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노매드랜드'는 "경이로운 성찰과 공감의 깊이"(버라이어티), "단연컨대 올해 최고의 영화"(벌처), "진정한 위대함"(가디언) 등의 극찬을 받았다.

'노매드랜드'는 오는 4월 15일 국내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자오 감독은 차기작으로 배우 마동석이 출연하는 마블의 액션 영화 '이터널스'를 올해 하반기 선보일 예정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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