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미술품·문화재로
'상속세 물납' 제도화해 달라"

"해외로 보내기 아까운 문화유산"
희귀·인기작 많은 '이건희 컬렉션'
삼성家의 선택은…
수兆 규모 이건희 컬렉션…'상속세 프레임' 바꿀까

“국회가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납부하는) 물납제 관련 세법 개정에 조속히 나서고 관련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 국세청 등도 적극적으로 후속 조치에 나서달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미술협회·한국박물관협회 등 12개 문화예술 단체와 박양우·유진룡·정병국 등 전 문체부 장관 8명이 3일 대국민 건의문을 내고 이렇게 호소했다. 문화계가 상속세 물납제를 제도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 개인 소장 문화재·미술품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여기저기 팔리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에 영구 보존, 전승하는 새로운 모델을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삼성가가 상속세와 관련해 고(故) 이건희 회장의 개인 소장 미술품 감정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물납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미술계를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다.
피카소·모네…세계가 놀란 컬렉션
미술품·문화재 물납제는 문화예술계의 오랜 염원이다. 물납은 현금 대신 다른 자산을 정부에 넘기고 해당 자산의 가치를 세금 납부로 인정받는 제도다. 지금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에만 적용된다. 지난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보물로 지정된 고려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으면서 미술품·문화재 물납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샤갈 ‘신랑신부의 꽃다발’

샤갈 ‘신랑신부의 꽃다발’

물납제 도입 논의에 탄력이 붙은 것은 이 회장의 소장품에 관심이 쏠리면서다. 미술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고인이 소장했던 미술품에 대한 시가감정이 진행 중이다. 다음달 말까지 상속세를 신고, 납부해야 하는 삼성가는 소장품과 그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이건희 컬렉션’을 본 미술계에서는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소장품의 수준과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어서다. 서화, 도자기 등 국보급 고미술품을 비롯해 피카소, 모네,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서양 현대미술품, 이중섭 김환기 이우환 등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아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정가 총액이 수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감정에 관여한 미술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확인된 소장품만으로도 세계 5대 미술관을 열 수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모네의 ‘수련’, 피카소의 ‘도라 마르의 초상’,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등 세계 미술시장이 들썩일 작품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 ‘무제’

마크 로스코 ‘무제’

감정 결과에 삼성 측도 놀란 것으로 알려졌다. 구매 시점보다 가치가 올랐을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높게 매겨질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 안에 있는 인물’은 비슷한 작품이 1500억원대,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은 1600억원대에 낙찰된 기록이 있다.
“문화자본 축적” vs “사유재산”
수兆 규모 이건희 컬렉션…'상속세 프레임' 바꿀까

삼성 측은 일단 감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고미술품은 호암미술관, 리움 등을 관할하는 삼성문화재단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고미술품은 해외로 반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양미술품이다. 이 작품들이 시장에 풀릴 경우 국내 전시장에서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내에는 이 정도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컬렉터나 기관이 없어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미술품 구입 예산은 48억원이다. 대여를 위한 미술품을 구매하는 미술은행 예산 28억원을 합치더라도 1년에 80억원을 넘지 않는다. 1000억원을 웃도는 자코메티의 조각상 하나도 구입할 수 없는 예산이다. 국내 미술계가 먼저 물납제 도입을 호소하고 나선 이유다.

문화예술계는 이번 대국민 건의문 발표에 이어 정부와 삼성 측을 설득해 나갈 계획이다.

반응은 엇갈린다. 문화예술계에선 “국가적 문화자본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방안”이라고 주장하지만 재계에선 ‘물납’ ‘기증’ 등의 프레임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반응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물납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삼성에 물납이나 기증을 강요하는 방식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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