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탁월한 진통제이거나…사회에 진통을 주거나
한 집 걸러 한 집꼴로 마약을 재배한다. 몸이 불편하면 마약을 일상적으로 복용한다. 누구도 마약을 사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정부는 알면서도 묵인한다. 범죄가 만연한 어느 후진국 얘기가 아니다. 조선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가 그랬다.

《마약의 사회사》는 마약의 정의가 한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근현대 한국의 마약 문제를 연구해온 조석연 신한대 교수. 그는 “마약은 의학 용어가 아니라 법률 용어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어디까지가 ‘잘 듣는 진통제’이고 어디서부터 마약인지가 국가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다는 뜻이다.

저자는 정부 발표 자료와 신문 등 다양한 사료를 근거로 마약문제의 변화상을 재구성한다. 조선시대에는 양귀비를 원료로 하는 아편이 가정상비약이었다. 약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아편은 탁월한 진통·해열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약의 재배 및 이용은 민간의 자연스러운 권리였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아편 중독 문제가 심각해지자 조선 정부는 아편 사용을 처음으로 금지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이 일본의 아편 공급지가 되면서 수많은 아편 중독자가 생겨났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마약을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단속했다. 하지만 농어촌과 광산 등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약 기운을 빌리는 경우가 여전했다. 1965년에는 제약사들이 판매한 해열제와 비타민제에 합성 마약인 메사돈이 포함돼 있고, 일부 정치인이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대마초, 1980년대에는 필로폰이 주 단속 대상이 되는 등 시대와 사회 환경에 따라 마약에 대한 인식과 통제는 계속 달라졌다.

저자는 마약의 정의가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 따라 결정돼 왔다고 거듭 강조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대마초 합법화를 공약한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의료용 대마초 재배 회사 등에 투자하는 ‘대마초 상장지수펀드(ETF)’ 수익률이 급등하고 있는 기현상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