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대마도 이즈하라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사진=대마도 이즈하라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 정부와 대마도 사이에는 강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약탈전쟁이 실패한 탓에 무사와 백성들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높아졌고, 토지의 황폐화로 사회의 토대가 흔들렸다. 참전 세력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신 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신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조선도 무너진 사회체제와 왕조의 권위,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또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들의 압박이 시작됐다. 이미 어선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고, 청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공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배후의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컸다.

두 나라는 실리와 형식을 놓고 조정한 끝에 조선이 1607년에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서 일부 포로를 송환했고, 1636년에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에 일본은 쇼군이 새로 등장하면 조선에 고보(통보)하는 사신을 보냈고, 조선 정부는 답방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811년까지 9차례나 파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12번이다. 미묘한 정치 행위였지만, 규모가 매우 크고, 동아시아 질서에서 파급력이 큰 행사였다. 특히 일본 측으로서는 전 국가적인 행사로 꼽혔다. 또한 대마도에는 영향력을 강회시킬 목적으로 따로 ‘문위행(問慰行)’이라는 소규모 사절단을 1860년까지 53회나 파견했다.

통신사의 행적

귀중한 기회 놓친 조선통신사의 행적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통신사는 한양에서 출발해 한 달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출항 준비를 마친 후에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올렸고, 대마도에서 파견된 선원들과 상의해 출항 날짜를 골랐다. 남해안과 대마도 사이는 55km에 불과한 좁은 수로지만, 조류가 복잡해 도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와니우라항에 도착한 후에 성이 있는 이즈하라(嚴原)로 이동해 도주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대마도를 출항해 39개의 항구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한 후 육로를 이용해 에도(동경)까지 갔는데, 1763년에 파견된 조엄이 쓴 '해사록'에 따르면 1만1300여 리에 달했다.

신유한 일행은 3척의 사신선과 식량, 식수, 물자, 상인들을 실은 종선 3척 등 6척에 479명이 승선했다. 이처럼 400~500명의 대인원 속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비롯해 각 분야의 인재와 기술자 선원들, 그밖에 비공식적인 인원들이 포함됐다. 현재 남은 ‘조선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가장 긴 것은 길이 25m인데, 580개의 가마, 119필의 말, 4,80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대규모이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컸지만 행사경비, 예단, 무역품 등으로 경비지출이 과다했고, 특히 일본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손승철 《조선 통신사의 길 위에서》).

대마도를 출항하면 이끼섬을 거쳐 규슈 북부의 ‘남도(藍島)’에 처음 상륙했다. 1682년에는 무려 1312척의 배와 3141명의 선원들이 일행을 영접했다. 물론 지역마다,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카타를 거쳐 혼슈 남단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5년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 이 곳은 외해에서 세또 내해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오오사카나 동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대에는 가야인들, 백제인들, 신라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해역으로서 관련된 유적과 신화, 설화 등이 남아있다. 김세렴은 '해사록'에 놀랄만한 사실을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아카마세키(赤間關)의 동쪽 무덤을 백마분(白馬墳)이라고 지칭하면서 김춘추가 일본에 쳐들어오자 화호(和好)를 청해 흰 말을 죽여 맹세한 후 묻은 곳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유사한 내용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신유한의 '해유록' 등에도 있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일본 고대사》). 1711년의 통신사는 이 해역에서 아난타(인도)상인들을 만나 관찰한 내용을 기록했다. 한려수도만큼 아름다운 풍광에 대해 조선통신사들도 감탄하면서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남겼다.

통신사들의 일본 인식과 행로

표류순난비(와니우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표류순난비(와니우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을 모색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과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 일본은 멸시가 아닌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부르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하며 무시했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을 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을 치른 사실들이 여러 곳에서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후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해행총재》의 역주본).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의 기술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의 행태, 자기과시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연행사였던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일본 지식인들은 ‘신국(神國)’의식을 갖고, 일부에서는 통신사를 ‘사죄 사절’,‘복속 사절’로 인식했다.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통신사들과 교류한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 조차 일본 천황과 청나라 천자를 대등하게 놓고, 조선 국왕을 일본의 막부장군과 대등하게 보려고 했다. 이러한 인식과 관례가 이어져서 결국은 정한론 등으로 이어졌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닛꼬(일광) 도쇼쿠 ( 조선통신사가 기증한 종).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닛꼬(일광) 도쇼쿠 ( 조선통신사가 기증한 종).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선에 도움이 될 정보와 농법 등 신기술을 찾아내 개선을 건의한 경우도 있었다. 고구마를 도입한 조엄은 1763년에 파견됐는데, 현실적인 영조의 명으로 일본의 군사와 선박, 관방체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조사했다. 함께 간 남옥은 일본 선박들을 상세하게 관찰했고, 오히려 일본이 ‘투박하고 엉성한 우리 배를 보면 비웃는다’라는 글을 함께 남겼다. 훗날 박지원 등 혁신적인 북학파들에게 영향 끼친 원중거도 화선(和船), 즉 일본배가 민첩하고, 첨저형으로 되었다며, 우리배의 약점을 보완하는 내용을 썼다. 그가 건조한 비선(飛船)은 한강에서 시험 운행을 할 때 역풍을 헤치고 나갔다. 이들은 귀국 후에 두 나라의 배를 절충해 만든 모형을 통제영에 보내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 들이는데 인색했고,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서 침략 당사국에 파견한 사절단이라면 강한 애국심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초기에는 전쟁 상황의 규명과 책임론을 거론하고,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백성들의 자의식을 살려야 한다. 아울러 청나라의 침략이라는 현실에 대응할 방법론도 일본 측과 논의하고 찾아야 했다.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까지 이어진 일본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서구 문화와 사상, 기술 등을 도입하고, 진보한 세상을 지향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하지만 관찰력과 변별력, 지적 능력이 뛰어난 통신사들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관념적인 성리학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지적능력의 과시에 시간을 낭비했고,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역사를 보면 외국에 나간 관리, 지식인, 여행가, 탐험가들은 의도적, 아니건 간에 자국의 이익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정밀하고 깊이 있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현재는 더더욱 그렇지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