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이 귀국할 때 되찾아온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봉안한 건봉사의 대웅전.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사명당이 귀국할 때 되찾아온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봉안한 건봉사의 대웅전.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들이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제국을 건설했다.

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쯔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 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3만, 많게는 10만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 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일본군의 조선 약탈과 포로 포획


전쟁은 고도의 정치 행위, 경제행위이며, 또한 문화 행위이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된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의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들,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임진왜란으로 눈물 흘린 조선 포로의 삶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고, 일부는 일본인의 가정 노예들로 변했다. 세월이 흘러 조선통신사들이 도착했을 때 애까지 낳은 조선 여인들이 행렬로 다가와 향수를 하소연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바닷가 마을인 우나쯔라(女連)에는 선조의 딸인 옹주의 무덤이 잊힌 채로 남아있다.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귀국해서 쓴 《간양록》에 대마도에 많은 사람이 조선의복과 언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포로로 붙들려간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처참한 증언이다 (윤명철, 《한민족 해양활동 이야기》 2).

기술자로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은 다도의 융성과 무역 상품용으로 수준 높은 도자기의 필요성이 컸다. 조직적으로 끌려온 도공들은 혼슈 남쪽의 하기(萩), 규슈의 가라쯔(唐津), 아리타(有田), 사쓰마(薩摩) 등에서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생산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마리항과 나가사키 항을 통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에 아리타 도자기를 무려 520만점이나 유럽으로 수출했다.

또한 많은 포로가 자의 또는 타의로 천주교인이 됐다. 나가사키에만 세례자가 1300여 명이었고, 1610년에는 고려정(마을)에 성당을 건축했을 정도다. 막부의 억압으로 많은 조선인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 예로 ‘오다 줄리아’는 고니시 유끼나까의 어린 양녀로 들어가 천주교의 세례를 받고, 절해고도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수군의 전선인 판옥선 모형. 사진=국립해양 유물전시관
조선수군의 전선인 판옥선 모형. 사진=국립해양 유물전시관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포로들은 해외에 노예로 팔려나간 사람들이다. 일본, 포루투칼, 에스파니아, 네덜란드, 청나라 상인에 의해 마카오, 동남아시아, 인도, 이탈리아, 포루투칼 등지로 팔려나갔다. 루벤스가 그린 소묘의 모델로 알려진 ‘안토니오 꼬레아’는 이때 이탈리아로 팔려 간 인물이다.

또한 탈출을 시도해 귀환에 성공한 일부 포로들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1600년 2월 29일 옥포에는 ‘남녀노약’ 30구의 조선 포로들이 탈출해서 생환했다. 그해 4월 27일 조정에 보고된 내용인데,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김학성 등 남녀 21명은 오사카부터 대마도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동쪽 바다(동해)를 건너 귀환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교류하면서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일본 상황을 국내에 비밀리에 보고했거나 귀국 후에 보고했다. 도망쳐 온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은 분열됐고, 앞으로 조선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꽤 많았다. 《국조인물지》에 기록된 이엽 장군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좋은 대우와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

쇄환, 즉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1604년 6월에 나라를 망친 성리학자들 대신 승병장인 사명당이 ‘탐적사’로 파견됐다. 일행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3000여 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돼 전후 문제 등을 논의하고, 1240여 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1624년에도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물론 일본이 자발적으로 쇄환시킨 포로들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종전 전에 강화를 요구하면서 조선 포로들을 500명 가까이 돌려보냈다. 광해군 때에도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면서 잡혀갔던 백성들을 잇달아 쇄환시켰다(《광해군일기》)

귀환 포로에 대한 조선 정부의 태도

 의병장이며, 1차 탐적사로 포로들을 쇄환시킨 유정 사명당 동상. 장충공원.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의병장이며, 1차 탐적사로 포로들을 쇄환시킨 유정 사명당 동상. 장충공원.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그러면 조선 정부와 사회는 귀국한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첫째, 의심하고, 경계했다. 선조 38년 6월 17일 기사에는 사명당을 따라 대마도에서 온 박수영이 나라를 배반해 인명을 많이 살해했으니 형벌을 주자는 요청에 선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1601년에는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80여 명이 함께 탈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의 자연재앙과 분열상황 등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일단 의심을 하고, 조사를 실시했다(《선조실록》).

둘째, 믿기 힘들지만 냉대와 억압 등을 많이 저질렀다. 2차 쇄환 때, 3차 소환 때에는 관리들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귀환 포로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일도 빈번했다. 《선조실록》 1605년 6월 7일자에는 유정(사명당)이 쇄환해 온 사람들을 마음대로 소유하고, 매질하니 속량(노비를 면해주는 일)해서 군인으로 해야 한다고 아뢰어 선조의 윤허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도 (부모·성명 등) 연고를 모르는 사람들은 종으로 만들고, 여자가 예쁘면 남편을 묶어 바다에 던지고, 멋대로 자기 여자로 만드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문벌사족들은 식구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절개와 의리를 상실한 일이라고 평가해 쇄환된 사실을 숨겼다(민덕기,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한 일 관계》).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들 때문에 강항이나 정희득 등의 인물은 능력이 뛰어났고, 나라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채 정보를 보고했음에 중용되지 못했다. 조완벽은 포로로 끌려가 일본 무역선에 함께 타서 베트남을 3회, 필리핀을 1회 방문했다. 조선 입장에선 국제사회 동향과 무역 등 필수적인 정보와 실무경험을 가진 필요한 인물임에도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가 쇄환포로들을 냉대한다는 사실은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은 이를 과장해서 포로들의 귀국을 막으려 했다(이채연, 《임진왜란 포로실기연구》). 한편 중국 지역으로 간 백성들도 있었다. 전쟁통에 살 곳을 잃고 유리하던 백성들이 명군을 따라다니며 생존하다가, 철군할 때 함께 건너가 1000여 명의 백성들이 요동, 산해관(山海關) 등에 살면서 귀국을 원한다는 내용을 비변사가 상주했다(《선조실록》 1599년 9월).

조선 정부는 백성들의 삶에 무관심했고, 그들의 기술력, 문화적 능력, 경제적 가치 등을 일본처럼 주목하지 않았다. 또 백성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넣는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남의 나라에서 포로로, 노예로 고통받는 자국민들을 구원하는데 소홀했다.

역사에는 반드시 ‘인과 응보’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도 채 못된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해 멸망 직전까지 갔다. 당시 세자를 비롯해 무려 50만~60만명의 백성이 추운 북쪽 땅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고, 죽임을 당했다.

역사와 희생자들을 망각한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인과응보’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몰라 수심이 떠나질 않는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