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물건들에 새긴 옛 선비의 정신세계
“가득하게 차 있는 것은 공기(盈盈者氣)/그것을 움직이면 바람이 되지(動之則爲風)/그리할 재주 갖고 있으나 조용히 숨기고 있다네(有動之之才而卷而懷之)/고요한 외연, 그 속엔 바람이 간직되어 있다지(寂然而風在其中).”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독 아꼈던 접이식 부채(쥘부채)에 새겨넣은 글귀다. 평소에는 가지런히 부챗살을 모으고 있다가도 ‘쫙’ 펼치면 더위를 물리치는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기특했나 보다.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을 지낸 임자헌 씨는 저서 《銘(명),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에서 “쥘부채는 그 재주를 세상이 섣불리 발견할 수 없게 자기를 접어 자신이 부채라는 사실을 감춘다”며 “쥘부채 같은 인재를 찾아 펼쳐 주기만 한다면 어느 곳으로든 옮겨 다니며 이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銘(명)’은 과거 선비들이 아끼던 물건에 새겨넣은 글을 뜻한다. 물건의 내력과 그것에 대한 단상, 나아가 그것을 보고 떠오른 삶의 성찰이 주요 내용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 역사 속 유명 선비들이 지은 명 60여 편을 싣고 각 편에 대한 설명과 단상을 덧붙였다. 각 명을 소개하는 난에 삽화 작가 정민주 씨가 그린 그림을 함께 담았다.

저자는 “명에 담긴 사유를 음미하다 보면 요즘 같은 풍요와 소비의 시대에는 아무리 많이 공부한 지식인이라도 이런 글을 쓰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릇, 목침, 부채 등 일상 속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보며 삶의 본질을 깨닫고 자신을 성찰한 옛 선비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252쪽, 1만2000원)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