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씨(53)의 시조집 '햇빛시간'(태학사)은 조선 백자처럼 단아하다. 30여년간 어루만진 시조들이 농익은 정조와 달관된 어법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렇게 맑고 투명하게 빚느라고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도록 가슴에 품고 있었을까.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물총새에 관한 기억' 전문) 초장과 중장 종장의 배경은 다르지만 그림첩을 접어놓은 것처럼 서로 맞닿아 있다. 인사동에서 우연히 본 그림과 유년기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텔레비전 화면 속의 녹슨 갈대밭…,먹으로 그린 옛그림의 흑백 화폭과 총천연색의 유년 추억 그리고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가는 물총새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잘 익은 운율과 아름다운 정형시의 매력을 한껏 발휘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는 꽃과 서체가 자주 등장한다. '덩굴손/긴 봄날이/흘림체로/쓰여지고/뻐꾸기/울음소리에/번져 가는/푸른 적막/못 이룬/지상의/꿈이/메꽃으로/지고 있다'('이 순간'전문) 메꽃은 낮에만 선홍색으로 피고 밤에는 시든다. 못 이룬 지상의 꿈이 이 꽃과 함께 지고 있다는 표현이 '흘림체'라는 봄날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고딕체의 딱딱함보다 흘림체의 유려함을 택하는 시인.그의 시에 서체 얘기가 자주 나오는 건 직업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는 동학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표지도 만드는 북디자이너다. 20년간 1천5백여권의 표지를 디자인했고 이번 시집 표지도 직접 꾸몄다. 누구보다 독자와의 교감을 중시하는 그는 시조 형식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촉촉하고 달콤한 연애시를 뽑아 올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눈물도 아름다우면 눈물꽃이 되는가/깨끗한 슬픔 되어 다할 수만 있다면/오오랜 그대 별자리 가랑비로 젖고 싶다/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꽃이 지는 일까지/그대 모습 다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가/깨끗한 슬픔 하나로 그대 긴 손 잡고 싶다'('깨끗한 슬픔' 전문)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