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편지 한 통을 묻고 죽었다.

"내가 그토록 먼 길을 돌아다녔던 것은 바로 당신 앞에 도달하기 위한 긴
과정이었소. 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처럼 나의 정상은 바로 당신이었소.
당신을 만나고 뭔가 부활했소. 그건 사랑이오"

해발 8천5백11m의 로체 고봉.

산소마스크도 없이 깎아지른 얼음벽을 혼자 오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희박한 공기 속에 떠 있는 신의 세계.

지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은 이곳에서 영원히 만년설로 빛나는 신화가 되어
거듭난다.

소설가 김미진(37)씨가 4년만에 펴낸 장편 "자전거를 타는 여자"(중앙M&B)
는 자신을 극한으로 내몬 한 남자와 여자의 슬픈 러브 스토리다.

에베레스트 로체 남벽을 등반한 한국 대원들이 정상에서 눈 속에 파묻힌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한다.

그 속에는 3년전 실종된 산악인 하훈이 남벽에 오르며 한 여인에게 쓴
유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매개로 하훈과 나미목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펼쳐
진다.

미목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에 스스로 선택당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가 가장 깊은 곳으로 추락한 하훈과 함께 그녀는
숭고한 사랑의 산봉우리들을 밀어올린다.

하훈과 처음 잠자리를 같이 하고 헤어지던 날 아침,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는 처연한 마음과 달리 햇살은 너무 찬란하게 반짝였다.

이 남자를 보내고 나면 영원히 후회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그녀로서는
날씨라도 흐렸다면 슬픔이 가려지기도 하련만...

미목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족쇄에 버거워 하다가 히말라야로 떠난 하훈을
찾아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멀리 눈 속으로 점점이 움직이는 그를 망원경으로 바라
본다.

마침내 그 점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가 느낀 절망감은 어땠을까.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구조대도 철수한 뒤 그녀는 히말라야에서 흘러
내리는 두드코시 강물로 걸어들어가 사랑하는 남자와 한몸이 된다.

미목이 죽기전 두드코시 강변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격정적이면서도
차갑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는 거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죽음은 산 자의 몫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지난해 네팔에 다녀온 작가는 "다른 대목도 그렇지만
편지 부분은 정말 내가 미목이 되어 썼다"고 말했다.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폭발적인 희열과 어떤 극한의 경지는 서로
닮았잖아요.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게 아니라 직감이라는 빛에 의해 선택
당하는 것이지요.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추락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등정처럼 두사람 다 극한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그의 전작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과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가
다소 추상적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구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회화적 이미지가 선명하다.

문장도 짧고 경쾌해 속도감있게 읽힌다.

작가 스스로도 "자기 혼자 즐기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작품을
써보고 싶었다"며 "곁눈질하지 않고 산의 꼭대기까지 곧장 밀고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