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진의 바이오 뷰] 일상(日常)과 임상(臨牀)
‘흔히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임상환자를 진 료하거나 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병상에 임하 는 일’이 일상(日常)과 임상(臨牀)의 사전적인 뜻이다. 한글로는 운(韻)이 맞지만 한자로는 전혀 다른 이 두 단어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바이오 분야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이유
일상이라는 단어의 어감(語感)은 익숙함, 평 온함, 단조로움, 무료함, 지루함 등 왠지 그저 해오던 대로 그저 그렇게 왔다가 흘러간다는 느낌이다. 즉 동(動)적이고 변화무쌍한 것보다는 해오던 대로 계속했고,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라는 정(靜)적이고 관례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일상은 큰 차이가 없는 똑같은 것일까. 답은 ‘아니요’다. 누군가에게 일상은 동일함과 안주함의 반복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변화와 도전의 반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변화 없는 반복적인 일상이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전제를 하고 싶다.
익숙함에 기반한 반복적인 일상은 그만큼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예측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계속해온 생활이니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긴장이나 심각한 걱정을 하거나 대단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스로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물에게는 정신적 피로라는 현상이 있다. 피로에는 신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가 있다. 이를 물리적인 피로와 화학적인 피로로 표현하기도 하며 신체적 피로가 정신적 피로를, 정신적 피로가 신체적 피로를 유발하는 상호작용이 있다.
새롭고 불확실한 일에 대해 심한 스트레스와 과도한 작업부담으로 인한 피로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동일한 반복적인 작업과 사고에 의한 무료함이 유발하는 피로도 있다. 변화가 없고 반복적인 일상의 지루함의 정신적 피로가 무기력이라는 신체적 피로로 이어지는 이치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사람들은 작건 크건 일상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라고, 변화를 주라고 조언하곤 한다.

많은 사람이 단조롭고 변화가 없는 일상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누려온 일상에 만족해서, 다른 일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해서, 혹은 알지만 귀찮아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일상의 변화를 꾀했다가 실패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는 본인이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상을 남에게는 추천하고 본인은 안주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다.

기존 임상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는 것, 안정적이지만 최선은 아닐 수 있어
바이오의 일상은 어떠한가. 일일이 열거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바이오의 일상은 다양하니 영향력 있는 단어 중의 하나인 임상시험을 예로 들어보자.

국내 바이오산업의 발전 속도는 가히 인상적이다. 최근에는 신약의 최종 승인과 상용화라는 쾌거도 이루는 등 임상시험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임상시험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임상시험은 간단히 말하면 후보물질이 최대 한의 효능과 최소한의 독성이 나오도록 디자인돼야 한다. 물론 임상 디자인이 성공의 반을 차지한다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고 수많은 조건과 변수가 지정되고 복잡한 통계학적인 분석방법이 동원된다. 이를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주도해 물질의 장점과 특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임상 디자인을 한다.

신약 후보물질의 종류에는 진정한 신물질, 유사·개량 물질, 복제물질 등이 있다. 임상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는 앞서 수행된 임상시험의 디자인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신물질은 어차피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학계, 산업계, 그리고 규제 기관과의 긴밀한 협력과 자문을 통해 디자인을 완성해간다.

그런데 유사·개량 물질이나 복제물질은 거의 변화 없이 그대로, 어쩌면 잠재적인 경쟁물질의 임상 디자인을 베끼는 수준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앞에서 사용돼 승인과 상용화에 성공한 디자인은 선행 물질에 최적화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같거나 유사한 적응증과 기전의 물질이니 이를 시험하는 임상 디자인이 크게 다를 필요가 없고 결국에는 같은 디자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상과 비교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시험 물질의 특성이 최대한 반영되지 않 은 선행 경쟁물질에 최적화된 임상 디자인을 거의 수정 없이 사용하는 것은 마치 변화 없는,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늘 해오던 익숙한 것은 쉽고 편안하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있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없다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상과 의미 있게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좋은 선례를 본받고 인용하여 우리의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도, 게으르거나 비겁한 행위가 아니다. 모방도 바이오 분야에서는 적절한 기준과 논리에 근거해 엄격한 규제하에 행해진다면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창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도용과 편법이 아니라면 정당하고 생산적인 경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임상은 발전하고 진화해야 할 바이오의 일상이자 핵심
우리의 일상은 누구에게나 같다고 여겨질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사람이 동일 하거나 아주 유사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부 사회구성원의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 분명히 다르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남들과 다르고 자신의 일상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를 수 있다. 사회생활의 자연스러운 다양성의 결과일 수도 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바꾼 다른 일상인 경우일 수도 있다.

임상시험은 바이오의 일상이다. 그리고 발전하고 진화해야 하는 바이오의 핵심 행위다. 내가 개발하고 있는 물질에 최적화된, 그리고 잠재적인 경쟁물질에 비해 단순히 동등하거나 비열등한 결과가 아닌 더 우월한 효능이 관찰되는 영역을 찾아낼 수 있는 변형되고 세련된 디자인을 그려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의 몫이다.

진정한 전문가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일상의 다양하고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시킬 줄 아는, 실제로 해본 사람이다. 임상시험은 단조롭고 무료한 반복이 아닌 변화와 도전과 두려움의 극복으로 가득 찬 신나는 일상이다.

<저자 소개>
[김선진의 바이오 뷰] 일상(日常)과 임상(臨牀)
김선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비뇨기과 전문의다. 일본국립암연구소의 초빙연구원을 거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교수로 근무했다. 한미약품 부사장을 역임하고 플랫바이오를 설립했다. 중개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암연구학회(AACR)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