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암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은 폐암이다. 흡연자에게 많이 생기는 소세포폐암은 전체 폐암 환자의 15% 정도. 나머지는 비소세포폐암 환자다. 세계 제약사들이 비소세포폐암 항암제 개발에 집중하면서 유전자 변이에 따른 다양한 표적항암제, 면역 스위치를 조절하는 면역관문억제제 등 치료제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K-RAS·엑손20 타깃 폐암 신약 나왔다

암젠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K-RAS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 치료제인 ‘루마크라스’의 긴급사용승인을 받았다. K-RAS 돌연변이를 타깃으로 한 치료제가 사용 허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암젠은 K-RAS를 극복하기 위한 40여 년간의 연구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했다.

암젠은 K-RAS G12C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비소세포폐암 환자 124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이들은 모두 기존 면역관문억제제나 화학항암제로 치료했지만 약이 듣지 않던 환자다. 암젠의 신약을 쓴 뒤 환자의 36% 정도는 암 덩어리가 최소 30% 이상 줄었다.

(ORR=36%). 이들 중 58%는 6개월 넘게 치료 효과가 이어졌다. 설사, 근골격계 통증 등의 부작용을 호소한 환자는 20% 이하였다. 환자 9%는 부작용으로 치료를 중단했다. 암 극복 연구가 활발하지만 폐암은 여전히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다. 폐암 사망자는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환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7%에 불과하다. 매년 세계적으로 신규 폐암 환자가 220만 명 보고되는데 이 중 비소세포폐암 환자는 84%에 이른다. 미국에서만 매년 23만6000명이 진단받는다.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EGFR 유전자 변이를 타깃으로 한 항암제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 유한양행의 렉라자 등이 이를 억제해 암을 치료하는 원리다. 이후 ALK 돌연변이를 타깃으로 한 로슈의 알레센자, 다케다제약의 알룬브릭 등이 출시되면서 치료 옵션은 더욱 늘었다.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돌연변이 중 하나가 K-RAS다. 전체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25% 정도가 K-RAS 돌연변이 환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아 환자의 10~15% 정도다. 하지만 그동안 이를 타깃으로 한 치료제는 개발되지 못했다. K-RAS 돌연변이가 있는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25% 정도가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의미다.

암젠에서 개발한 K-RAS 치료제는 K-RAS G12C를 타깃으로 한 표적항암제다. 12번 유전자의 글리신이 시스테인으로 바뀌어 암이 계속 증식하는 상태다. K-RAS 돌연변이 중 가장 흔한 유형이다. 미국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13%가 K-RAS G12C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 치료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해당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환자를 잘 가려내는 게 중요하다. 암젠은 진단회사인 퀴아젠, 가던트헬스와 함께 이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를 찾아내기 위한 동반진단 기술도 개발했다. 환자가 비소세포폐암으로 진단받으면 기존 바이오마커뿐 아니라 K-RAS G12C 돌연변이 검사도 받게 된다. 업계서는 암젠이 이 약을 통해 올해 1900만 달러, 내년 1억3800만 달러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6년 매출 전망치는 10억 달러(약 1조1100억 원)가 넘는다.

암젠에 이어 가장 빠른 속도로 K-RAS 파이프라인을 확장하고 있는 곳은 미라티다. 미라티는 루마크라스와 같이 K-RAS G12C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삼는 아다그라시브를 개발하고 있다. K-RAS G12D 돌연변이 표적치료제 MRTX1133도 개발 중이다. 미라티는 당초 올해 말 발표하려던 아다그라시브 임상 결과 발표 시기를 내년 1분기로 미뤘다. 암젠의 K-RAS 치료제 허가 과정에서 FDA이 요구한 저용량 투여 임상 등을 추가로 하기 위해서라는 관측이 나왔다. 중국 바이오회사 자이랩은 미라티의 아다그라시브 중화권 공동개발 및 판권을 3억3800만 달러에 사들였다.

EGFR 표적 항암제도 추가 승인을 받았다. 존슨앤드존슨의 리브레반트다. 이 치료제는 EGFR 돌연변이 중 세 번째로 환자가 많은 엑손20 삽입 변이 환자를 타깃으로 한 첫 치료제다. 비소세포폐암 환자 중 EGFR 엑손20 변이 환자는 2~3% 정도다. 엑손20 변이는 기존 엑손19 결손 변이나 L858R 변이 환자보다 생존율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치료제가 없어 상당수 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리브레반트와 함께 엑손20 변이를 확인하는 가던트헬스의 동반진단 제품도 함께 허가받았다.

로이반트, 상장 후 이뮤노반트 재인수

스위스 바이오 회사인 로이반트가 올해 3분기 몬테스아르키메데스애퀴지션(MAAC)과 합병해 스팩 상장한다. 상장 기업 가치는 73억 달러다.

헤지펀드 투자자인 비벡 라마스와미가 2014년 세운 로이반트는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이용해 신약후보물질을 발굴하는 회사다. 라마스와미는 대형 제약사의 소외된 파이프라인, 개발 가치 있는 저평가된 후보물질 등을 찾아내기 위해 회사를 세웠다. 각각의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다양한 자회사를 세워 매각하는 방식으로 몸집을 불려왔다. 2019년에는 5개 자회사를 수미토모다이닛폰에 매각하는 계약을 맺었다. 최대 30억 달러 규모다.

로이반트는 40개 넘는 후보물질을 개발해 미국 FDA로부터 2개 치료제를 허가받았다. 2017년에는 신경계 질환 자회사인 액소반트사이언스가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임상 3상에 실패하면서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이 후보물질은 2014년 GSK로부터 500억 달러에 도입한 것이었다.
로이반트는 스팩 상장 후 이뮤노반트의 지분을 추가 매입해 인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뮤노반트는 2020년 헬스사이언시스애퀴지션과 합병하며 스팩 상장했다. 당시 기업가치는 5억5600만 달러로 평가받았다. 이후 기업가치는 15억 달러로 높아졌다. 로이반트의 이뮤노반트 지분율은 57.5%다.

이미 스팩 상장한 자회사를 뒤이어 스팩 상장한 모회사가 인수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로이반트가 이뮤노반트를 재인수하려는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뮤노반트는 중증 근무력증, 갑상선 안증 등을 치료하는 단일클론 항체치료제를 개발해왔다. 부작용 위험 등을 고려해 올해 2월 임상을 중단했다가 최근 환자 모니터링을 강화하면서 재개키로 했다.

헬스케어 영역 확장하는 빅테크

빅테크들의 헬스케어 사업 확장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이들이 보폭을 넓히는 곳은 병원 정보 시스템 분야다. 시장 규모만 3조 달러에 이른다. 정보기술(IT) 공룡들은 의료 빅데이터를 보유한 병원과 손잡고 다양한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구글은 미국 대형병원 체인인 HCA헬스케어와 환자 기록을 이용한 헬스케어 알고리즘을 개발키로 했다. HCA헬스케어는 미국 21개 주의 2000개 넘는 지역에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구글과 함께 환자들의 디지털 건강기록은 물론 인터넷으로 연결된 의료기기 정보 등을 실시간으로 수집·저장한다. 이후 구글과 HCA헬스케어는 의사들의 진료 결정을 돕고 환자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다양한 알고리즘을 개발할 계획이다.

구글은 HCA헬스케어 외에 다양한 병원과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2019년부터 메이요클리닉과 손잡고 환자의 진료기록, 유전질환 데이터 등을 분석해왔다. 또 다른 헬스케어 그룹인 어센션과 환자 정보 검색도구인 나이팅게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의료 데이터 사업에 비교적 일찍 뛰어든 기업은 IBM이다. 의료용 인공지능(AI)인 ‘왓슨’을 개발했지만 사업성이 높지 않아 올해 2월 매각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미국에서 수십 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프로비던스 그룹과 헬스케어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이니셔티브 협약을 맺었다.

구글은 검색 엔진의 특성을 살려 소비자가 피부 사진 등을 올리면 질환 정보를 알려주는 AI 기반 앱도 출시했다. 유럽연합(EU)에서는 1등급 의료기기로 CE 마크를 받았다. 아직 미국 FDA 승인은 받지 않았다. 사용자가 증상과 함께 병변 이미지 등을 올리면 AI는 288개 질환 중 일치하는 질환을 선택해 보여준다. 구글에서 내놓은 첫 소비자용 의료기기다.

매일 수백만 명이 자신의 피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구글 검색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부과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은 20억 명에 이른다. AI를 이용해 질환을 선별하면 이들의 치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구글 측의 설명이다. 구글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6만5000개의 피부 질환 이미지 등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의 헬스케어 영역 진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모회사인 알파벳의 자회사 베릴리와 함께 당뇨병성 망막증을 선별하는 머신러닝 도구를 개발했다. 구글 피트니스 앱에 맥박 측정 기능을 추가한 것은 물론 네스트허브 2세대 버전에 수면 추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네스트허브는 모니터가 달린 AI 스피커다.

빅테크들의 헬스케어 영역 확장은 온라인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마존이 오프라인 약국 개설을 고려하고 있다고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보도했다. 아마존은 2018년 온라인 약국 서비스를 하는 필팩을 10억 달러에 인수한 뒤 지난해 본격적으로 온라인 약국 사업에 진출했다. 아마존은 홀푸드 등의 매장에 오프라인 약국을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면역관문억제제 개발 속도 내는 제약사들

BMS가 미국 생명공학회사 아제너스의 ‘AGEN1777’을 함께 개발하기로 했다. TIGIT와 다른 비공개 타깃을 억제하는 이중항체 치료제 후보물질이다. BMS는 계약금 2억 달러를 포함해 마일스톤에 따라 최대 13억6000만 달러를 아제너스에 지불한다. 개발이 끝난 뒤에는 매출에 따라 일정 비율의 로열티도 지급하기로 했다. AGEN1777은 전임상 단계다. 아제너스는 올해 2분기 안에 미국 FDA에 임상시험 계획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비소세포폐암 등의 치료제로 개발하는 게 목표다.

TIGIT는 차세대 면역관문억제제 후보물질로 주목받고 있다. TIGIT는 T세포와 NK세포에 있는 면역수용체다. T세포나 NK세포에 있는 TIGIT와 CD226 수용체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암세포 등에서 CD155가 활성화되면 면역세포에 있는 CD226 수용체가 이와 결합해 암세포를 공격한다. 하지만 TIGIT가 CD155와 결합하면 면역세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 면역 스위치가 꺼지는 셈이다.

TIGIT는 주로 폐암 세포에 활성화되는 T세포에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작동을 막으면 암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면역세포의 수용체를 억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면역관문억제제로 분류된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TIGIT 파이프라인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개발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로슈다. 자회사 제넨텍을 통해 TIGIT와 PD-L1을 표적으로 삼은 티라골루맙을 개발하고 있다. 임상 3상 단계다.

MSD도 비소세포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TIGIT 파이프라인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항체치료제인 비보스톨리맙도 임상 3상 단계에 진입했다. BMS는 이번에 도입한 AGEN1777 외에도 자체 파이프라인인 BMS-986207을 개발하고 있다. 임상 1·2상 단계다.

키트루다, 옵디보, 여보이 등 PD-1, CTLA4 계열 면역관문억제제가 잇따라 블록버스터 반열에 오르면서 후속 주자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길리어드사이언스는 TIGIT 후보물질을 보유한 아커스바이오사이언스와 12억2500만 달러 규모의 공동계약을 맺었다. 중국의 시스톤은 3기와 4기 폐암 환자에게 모두 적용할 수 있는 PD-1/PD-L1 단일클론 항체치료제인 수게말리맙을 개발하고 있다. 임상 3상 시험을 마무리하고 중국 내 허가를 앞두고 있다. 미국 바이오 회사 이큐알엑스는 지난해 최대 11억5000만 달러를 시스톤에 지급하는 조건으로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이지현 기자

*이 기사는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