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직원들이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에 필수적인 슈퍼컴퓨터 ‘누리온’ 성능을 점검하고 있다. /대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직원들이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에 필수적인 슈퍼컴퓨터 ‘누리온’ 성능을 점검하고 있다. /대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어린아이부터 각계 원로까지 모두가 인공지능(AI)을 입버릇처럼 담고 누리는 시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디지털 기술의 총화인 AI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AI는 알고리즘, 초고속 통신, 고성능컴퓨팅(슈퍼컴퓨팅) 삼박자가 맞물려야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한다. 과연 우리는 AI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미·중·일 AI 각축전에 명함도 못 내

막강투자 日, 美 꺾고 슈퍼컴퓨터 1위 할 때…한국은 4계단 추락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말 AI 고도화의 관건인 슈퍼컴퓨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후지쓰가 함께 개발한 ‘후가쿠’가 세계 슈퍼컴퓨터 500대 순위(톱 500)에서 그동안 부동의 1위였던 미국 IBM의 ‘서밋’을 제치고 선두로 올라선 것이다.

가까스로 이긴 게 아니다. 실측 성능 442페타플롭스(초당 44경2000조 번 연산)로 서밋(148.6페타플롭스)의 세 배에 달하는 성능을 구현하며 미국을 속된 말로 완전히 ‘밟아버렸다’. 체면을 구긴 미국은 내년 초당 100경 번 연산이 가능한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 ‘프런티어’를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유럽연합(EU)도 후가쿠를 뛰어넘는 엑사급 슈퍼컴을 2022~2023년께 선보이겠다고 했다.

한국은 어떨까. 이런 슈퍼컴퓨터 성능 경쟁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보유한 국내 최고 슈퍼컴퓨터 누리온(13.9페타플롭스) 순위는 지난해 11월 기준 21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6월 17위에서 5개월 만에 네 계단 더 하락했다. 정치 지도층이 나서서 극일, AI 강국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각국 슈퍼컴퓨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대한 역할을 했다. AI 기반 연산 능력은 코로나19 치료제 및 백신 후보물질 탐색 시간 단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계산 현미경’으로 불리는 슈퍼컴 시뮬레이션은 바이러스와 약물의 상호작용을 원자 단위로 추적한다.

IBM을 비롯해 미 항공우주국(NASA), 인류 최초 원자폭탄의 산실인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LANL),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이 참여하는 코로나19 컴퓨팅 컨소시엄은 이 같은 성과를 토대로 지난해 말 “앞으로 반년간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운영에 집중한다”고 발표했다.

홍태영 KISTI 슈퍼컴퓨팅인프라센터장은 “누리온 능력의 40%를 분자동력학 등 화학, 바이오 분야에 사용하고 있다”며 “노벨화학상 단골 수상국인 일본의 저력은 결국 1위로 올라선 슈퍼컴퓨팅 인프라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초과학 투자 오히려 뒷걸음질

파괴적 과학기술의 기본이 되는 기초과학 분야 투자는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2019년 정부 연구개발(R&D) 통계를 보면 수학 물리 화학 등 5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액은 2조3774억원으로 5년 전인 2015년(2조4738억원)보다 오히려 4%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R&D 투자액이 17조5199억원에서 19조2597억원으로 10% 증가한 것과 대비된다.

선택과 집중 없이 ‘소액 과제 나눠먹기’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2019년 정부 R&D 과제 한 개당 연구비는 3억1214만원으로 5년 전(3억7272만원)보다 17%가량 감소했다. 반면 과제 수는 같은 기간 4만7005개에서 6만1701개로 31% 늘었다. 내년 사상 최대로 편성된 정부 R&D 예산 27조원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쓰이지도 않을 기술을 개발하는 현재 정부 R&D 구조는 문제가 있다”며 “핵심특허 창출 등을 평가해 예산을 차등 배분하는 성과 중심 모델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초과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연구자의 업적을 논문 게재 저널의 임팩트팩터(IF)와 논문 숫자로 파악하는 평가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논문의 피인용 수를 논문 게재 수로 나눈 IF는 ‘이미 정립된’ 분야에서 논문이 얼마나 활용되는지를 나타낸다.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혁신적 신기술을 주제로 한 논문을 평가하기엔 부적절한 지표다. 수학을 결합한 이론화학인 ‘수리화학’의 국내 개척자로 꼽히는 성재영 중앙대 화학과 교수는 “기초과학을 정량화해 평가하면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가 생존하기 어렵다”며 “국내 과학계가 종교처럼 신봉하는 IF를 대체할 평가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한국 기초과학은 영원히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