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말 열린 한국 전자·IT산업 융합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한 기업의 부스에 전시된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지난해 1월 말 열린 한국 전자·IT산업 융합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한 기업의 부스에 전시된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정부가 관(官) 주도형 ‘한국판 CES’를 또 열기로 했다. 작년 졸속으로 개최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도 올해엔 규모를 더 키운다. 전형적인 ‘보여주기 행사’에 기업 팔을 비틀어 동원하고, 혈세까지 쏟아붓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달 18일부터 사흘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제2회 대한민국 혁신산업대전’을 개최한다. 주무 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다. 이번 행사를 위해 각각 별도 예산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민간단체인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해마다 여는 세계 최대 전자쇼 CES엔 4400여 개 글로벌 전자·통신업체가 참가해 신기술과 신제품을 전시하고 거래한다. 이를 본떠 정부는 한국판 CES를 급조했다.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는 “규제 혁파 등 기업의 애로 해소에 힘써야 할 산업진흥부처 수장들이 국민이 낸 세금을 유용하고, 기업 팔을 비틀어 참여시키는 전시행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흥행실패 만회?…졸속 우려에도 '한국판 CES' 판 더 키운다
실패한 행사, 규모 오히려 키워

정부는 작년 1월 말 미국 CES가 끝난 지 3주 만에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같은 행사를 열었다. 첫 대회 때 흥행에 실패한 데다 행사 급조에 따른 기업 민원이 많았던 터여서 올해는 장소를 코엑스로 바꾸고, 시기도 2월 중순 이후로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행사 규모는 오히려 더 키웠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기존 참가 기업에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통신 3사를 추가해 판을 키우기로 했다. “작년 행사가 ‘다시 보는 CES’였다면 올해 행사는 ‘미리 보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까지 합치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라고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1월 초 미국에서 열리는 CES와 2월 말 스페인에서 개최되는 MWC는 모두 국내 ICT 기업들이 가장 공들여 준비하는 행사다. 한 해 장사를 결정짓는 주요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한 해 팔아야 하는 제품을 발표하고, 해외 주요 업체와 수출 상담도 벌이기 때문이다. 두 행사의 중간에 실익 없는 ‘보여주기 행사’를 끼워넣어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것이 기업들의 불만이다. 지난해 처음 ‘한국형 CES’가 개최됐을 때도 똑같은 불만이 제기됐었다.

ICT업계 관계자는 “MWC 준비 때문에 정신 없는 와중에 1주일 간격으로 또 다른 전시를 준비하라니 어이가 없다”며 “정부의 규제를 받는 기업으로선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겠지만 실익은 없고 부담만 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부실 전시’ 피하기 어려울 듯

기업들은 한 달여 전에 전시회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기업 전시기획팀 직원들은 해외 주요 전시를 위해 몇 달 전부터 현지로 날아가 전시를 기획한다. 한 달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일정이다.

촉박한 일정 탓에 올해도 ‘부실 전시’ 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LG전자의 롤러블TV는 해외 전시 일정 때문에 하루 만에 철수됐다. 삼성전자 부스에선 CES에서 공개한 이동형 로봇 ‘삼성봇 케어’를 볼 수 없었다. 네이버의 로봇팔 ‘앰비덱스’는 유선망으로 조작해야 했다. 앰비덱스는 5세대(5G) 이동통신을 활용해 원격조종할 수 있는 세계 최초 제품이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 CES에 출품했던 전자제품 등을 한국에서도 보여달라는 일반 국민의 요구가 적지 않았다”며 “이 행사를 계속 확대해 매년 정기적으로 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작년에 나왔던 다양한 지적 사항을 감안해 올해부터 국내 기업들을 위한 수출 상담회 등 부대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문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전시회 투어에 나서면서 일반 관람객 입장을 제한하기도 했다. 일반 관람객은 두 시간여를 기다려 겨우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해외 ICT업체도 대거 참가하는 CES와 MWC는 전시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이뤄지는 거래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개최하는 이번 행사에 해외 ICT업체가 얼마나 올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재길/전설리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