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BBC "유출 문서에 유엔 사무총장 사적 대화까지 그대로 담겨"

미국이 국제기구 수장들을 상대로도 광범위한 첩보활동을 벌인 사실이 최근 온라인에 퍼진 미군 기밀 문건으로 드러난 가운데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에 대해 러시아 측 요구를 너무 들어준다고 평가한 내용도 유출됐다고 영국 BBC방송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 유엔 사무총장 염탐하며 "러시아 요구 너무 들어준다 생각"
BBC는 유출된 문서 여러 건에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사무부총장 등의 사적인 대화가 기술돼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에 대한 구테흐스 총장의 솔직한 의견도 담겨 있다며 이같이 전했다.

한 유출 문서는 지난해 7월 세계 식량 위기 우려 속에 유엔과 튀르키예 중재로 체결된 흑해 곡물 협약에 관한 부분에서 구테흐스 총장이 이 협약을 지키려는 뜻이 너무 강해 러시아의 이익을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했다.

이 문서는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러시아의 수출 능력 개선을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며 "이는 제재 대상인 러시아 기업이나 개인이 관련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기술했다.

또 미국은 그에 대해 "2월에 있었던 그의 행동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광범위한 노력을 약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유엔 관리들은 그러나 구테흐스 총장이 러시아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한 유엔 고위 관리는 유출 문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면서도 "유엔은 최빈국에 대한 전쟁의 영향을 완화할 필요성에 따라 움직인다"며 "이는 식량 가격을 낮추고 비료가 가장 필요한 국가에 공급되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곡물과 비료는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러시아는 운송과 보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흑해 곡물 협약에서 철수하겠다고 여러 차례 위협한 바 있다.

유엔 관리들은 구테흐스 총장의 노력에 대한 미국의 해석에 불만을 표하며 구테흐스 총장은 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매우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유출 문서에는 또 구테흐스 총장과 사무부총장의 솔직한 대화는 물론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나 아프리카 지도자 등에 대한 평가 등도 그대로 담겨 있다.

구테흐스 총장은 대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유럽이 더 많은 무기·탄약을 생산해야 한다는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요청에 '실망'을 표했다.

아미나 모하메드 사무부총장은 구테흐스 총장과 아프리카 지도자 정상회담에 관해 이야기하며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에 대해 "무자비하다"면서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BBC는 미국이 유엔을 일상적으로 감시하는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런 스파이 행위 결과물이 공개되는 것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고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연합뉴스가 입수해 보도한 유출 추정 기밀문서에서는 미국이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등 국제기구 수장들의 대화를 엿들은 정황이 담겨 있었다.

해당 문서에는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방문 요청을 귀찮아 한다고 언급돼있다.

또 그로시 사무총장과 관련해서는 러시아군에 점령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시찰을 준비할 때 유엔이 난색을 보이자 그가 불쾌해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국방부 기밀문서 유출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동맹국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누가 왜 문서를 유출했는지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누가 왜 이 문서들을 유출했는지 모른다"면서 "일부 문서의 진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부 전반의 다양한 정보 출처에서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