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계기로 미·중 갈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만의 현상 유지’를 강조하는 미국과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인도·태평양 패권 경쟁에 양국의 국내 정치 상황까지 맞물려 어느 한쪽도 양보할 수 없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美 “현상 유지” vs 中 “심각한 사태”

대만 매체들에 따르면 펠로시 의장은 2일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뒤 오후 늦게 대만으로 이동했다. 그는 3일 차이잉원 총통과의 회담, 입법회 방문, 기자회견, 차이 총통과의 오찬 등의 일정을 소화한 뒤 오후에 다음 목적지인 한국으로 출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중국 톈안먼 민주화 시위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우얼카이시 등 반중 인사와의 만남도 예정됐다고 자유시보 등 대만 언론은 전했다. 당초 회담과 입법회 방문 일정만 진행하고 오전에 출국할 계획이었으나 대만 입국을 앞두고 기자회견과 오찬 등을 추가한 것이다.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1997년 뉴트 깅그리치 이후 25년 만이다.

펠로시 '논란의 대만行'…美·中 항공모함 대치 일촉즉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앞두고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자 미국 백악관은 1일(현지시간) 펠로시 의장에 대해 필요한 안전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의회는 (행정부에서) 독립돼 있기 때문에 하원의장이 독자적으로 방문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하원의장은 대만을 방문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에 변화가 없고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백악관은 애초 펠로시 의장의 행동이 미·중 갈등을 자극할 수 있다고 보고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하지만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 일정을 확정하자 신변 보장에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 국내 정치까지 얽혀

대만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제기해왔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도 “만약 미국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그로 인한 모든 엄중한 후과는 미국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중국 군용기 여러 대가 대만해협 중간선을 근접 비행했다. 중국 군용기는 전날부터 가까이에 머물면서 중간선을 잠시 건드리고 돌아가는 전술적 움직임을 반복했다. 대만과 미국의 군용기들은 근처에서 대기했다.

미·중의 핵심 전력인 항공모함도 출동했다. 미군은 남중국해에 있던 항모 로널드레이건호를 포함한 함정 4척을 이날 대만 동쪽 바다로 이동시켰다. 이에 맞서 중국의 랴오닝함과 산둥함도 각각 대만 북쪽과 서쪽 해역에 배치됐다. 펠로시 의장이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양측의 군사적 긴장은 지속될 전망이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는 양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얽혀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3연임을 확정하는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시 주석에게 대만 통일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급 지도자 지위에 오르기 위해 갖춰야 할 업적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시 주석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미국의 전략으로 보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무산되면 중국의 협박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양국의 치킨게임은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시 주석에게도 부담이 될 전망이다. 충돌로 이어지는 것은 미국이나 중국 모두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란 지적이다.

워싱턴=정인설/베이징=강현우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