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다국적 기업의 탈세를 막기 위해 역내 27개 회원국과 EU가 조세피난처로 지정한 19개국에서 국가별로 수익 및 납세 현황을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이번 방안은 EU 의회 표결과 각 회원국 비준 등을 거친 뒤 실행될 예정이다.

1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2년 연속 연간 매출 7억5000만유로(약 1조170억원) 이상인 다국적 기업은 EU 회원국과 EU의 조세피난처 목록에 오른 국가에서의 수익과 세금, 직원 수 등을 공개해야 한다. EU가 지정한 조세피난처는 미국령 괌, 버진아일랜드, 파나마, 피지, 사모아 등이다. 나머지 비(非)EU 국가에서 납부한 세금 자료 등은 총액만 제출하면 된다.

이번 합의는 다국적 기업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탈세를 해왔다는 비판이 높아지는 가운데 EU 차원에서 조세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역내 기업의 탈세 규모가 500억~700억유로(약 68조~9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U 순회 의장국인 포르투갈은 “이번 합의로 조세 정의를 위한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합의안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영업 활동을 하는 모든 국가별로 수익과 납세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좌파 성향의 마농 오브리 유럽의회 의원은 “스위스, 바하마, 케이맨제도 등이 조세피난처 목록에서 빠졌다”고 지적했다. 비영리단체 옥스팜도 “세계의 많은 조세피난처가 EU 목록에 포함돼 있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기업이 다른 곳으로 수익을 이전해 세금을 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업이 민감하다고 판단하는 정보를 최대 5년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점, 이번 합의가 EU 내에서만 적용된다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독일 녹색당 소속 즈벤 지골드 유럽의회 의원은 “큰 진전을 이뤘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나라가 비슷한 법을 채택해 완전한 그림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합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국제적으로 법인세 최저세율을 15%로 제안한 가운데 이뤄졌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저 법인세율에 대한 논의를 촉진하기 위해 우선 주요 7개국(G7) 차원에서 합의 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오는 4~5일 열리는 G7 재무장관 회의에서 관련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EU의 이번 합의는 우선 의회 표결에서 과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후 EU 회원국은 18개월간 국가별로 법제화를 추진할 예정이다. EU 회원국은 4년마다 법안을 재검토하고 개정 여부를 결정한다. EU 집행위는 이날 ‘EU 세금 조사국’도 발족했다고 밝혔다. 집행위는 조사국이 세금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각국의 세금 관련법 마련 등을 돕는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