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해방', 베트남의 자신감 [인사이드 베트남]
베트남 남부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인 붕따우(Vung Tau)의 주말은 말 그대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호찌민에서 붕따우로 이어지는 도로 위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호텔들은 오랜만의 특수를 만끽했다. 개방형 맥주 클럽엔 수백명의 인파가 몰렸다. ‘클러버’들은 심장을 두드리는 음악에 맞춰 파도처럼 요동쳤다. 오랜만에 개장한 그레이하운드 경견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코로나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베트남이 경제 분야에서도 빠르게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내수(內需)의 힘으로 적어도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외부에서 밀려 온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졌던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최근 공개된 베트남의 4월 상품, 서비스 소매 판매액은 전월 대비 –21%, 전년 같은 달에 비해서도 26% 감소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물리적인 이동이 제한된 결과다. 하지만 소비 심리는 양호한 편이다. 올 1분기 소비자심리지수는 122p로 집계됐다. 100점 이상이면 소비자가 경제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5월부터 내수가 꿈틀대기 시작한 데엔 이유가 있다.
'코로나 해방', 베트남의 자신감 [인사이드 베트남]
코로나19 이후 베트남 주식 시장으로 개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외국인의 이탈에 따른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하고 있다는 것도 베트남에선 처음 목격된 현상이다. 이달 4월(20일까지)에만 신규 개인 계좌가 3만6721개 개설됐다. 2018년 11월 이후 최대치다. 강문경 미래에셋 베트남법인장은 “5월 들어서도 하루 평균 거래량이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두 배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주가를 방어하기 위한 자사주 거래를 비롯해 ‘쌀 때 사두자’는 심리가 개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게 베트남 증시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덕분에 VN지수는 3월1일 662p로 급락했다가 5월29일 864p로 마감했다. 10여 년 전만해도 베트남 주가지수는 외국인, 개인할 것 없이 모두가 투매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면서 2009년 2월1일 245.74p로 급락했다. 2017년 2월1일 1137.69p에서 2년 만에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올 5월의 베트남 증시는 13% 상승이란 성적을 내며, ‘아시아 최고’로 등극했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최근 베트남TV 생방송으로 연결된 기업들과의 회의 자리에서 ‘올해 5% 이상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달성과 인플레이션 4%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IMF(국제통화기금)가 올해 베트남 GDP 성장률을 2.7%로 제시했고, S&P는 1.2%로 예측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온도차가 확연하다.

푹 총리의 주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푹 총리를 비롯해 2016년에 선출된 현 베트남 지도부는 5년간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내년에 베트남 경제가 회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해 최악의 성적표를 받는 것만은 피하는 게 훨씬 더 긴요할 수 있다. 올해 GDP 성장률 숫자와 현 지도부의 권력 유임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얘기다. 푹 총리는 경제를 총괄하는 수석 부총리 자리를 없애고, 총리실로 권한을 통합하는 등 연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베트남 외교가에선 푹 총리가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함으로써 그의 의지를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푹 총리의 자신감을 뒷받침해주는 건 베트남이 지난 10여 년 간 축적해 온 ‘내수의 힘’이다. 외국인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지만 않는다면, 5%대 성장이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만은 아닐 수 있다. 아세안 국가 중 베트남은 글로벌 기업들의 ‘차이나+원’ 전략 덕을 가장 많이 볼 국가로 부상 중이다. 올 1~5월 베트남에 유입된 FDI(외국인직접투자)는 67억 달러다.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2% 떨어졌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글로벌 기업들의 해외투자 심리가 위축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호한 성적이다. 인도네시아는 3월까지의 FDI만 공개돼 있는데 1~3월에 64억 달러가 유입돼 전년 대비 9.2% 하락했다. 사회적 격리가 본격화된 4, 5월 수치가 포함되면 인도네시아 FDI 하락률은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2008년 박닌성에서 휴대폰을 생산한 것을 기점으로 베트남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로 부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빠르게 진정된 것도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엔 호재로 작용했다. 마이너스 금리를 초래할 정도로 급격하게 풀린 전 세계 유동성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베트남으로도 흘러들었다. 베트남이 외국인들의 직,간접 투자금을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상당액이 지하경제로 스며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낙수 효과 역시 분명했다. 청년들은 원하면 어디든 취직할 곳이 생겼다. 베트남 실업률은 2009(1.74%)년 처음 2% 밑으로 떨어진 이래 작년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다. 호찌민, 하노이 등 기존 대도시 외에도 2선 도시들도 경제 성장의 과실을 누렸다. 베트남 정부가 고수하는 원칙 중 하나인 지역 균형 발전 덕분에 북, 중, 남부에 골고루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이 같은 낙수 효과는 공식 통계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현상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중저가 아파트 개발업체인 NHO 관계자는 “생애 처음으로 6000만원 짜리 아파트를 현금으로 구매하는 호찌민에 거주하는 40대 부부가 온 적이 있는데 돈 다발 밑에 흙이 묻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현금을 집 앞 마당에 묻어 뒀다가 가져온 경우다. 요즘은 은행 이용률이 높아지고, 모바일 결제도 흔해지긴 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여전히 현금과 금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트남 특유의 과시적인 소비문화는 그 만큼 지갑에 돈이 들어 있다는 증거다. 호찌민에 있는 이마트 1호점(고밥점)에선 2개 들이 10만동(약 5000원)짜리 한국산 왕딸기가 불티나게 팔린다. 호찌민 외곽에 있는 고밥은 한때 군부대 유류창고였던 곳으로 베트남의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완전 고용에 가까울 정도로 취직할 곳이 많은 데다 여성들도 일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한 덕분에 대부분의 부부들은 맞벌이로 생활한다. 젊은 맞벌이 부부가 받은 평균 월급은 대략 1000달러 안팎이다. 이들은 2만 달러짜리 액센트를 구매하고, 주말이면 근교로 나가 지인들과 함께 바비큐를 즐긴다. 주택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 편이다. 부모 세대 대부분이 전쟁 후 국가로부터 불하받은 조그만 집과 땅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2010~2019년에 전 세계에서 부유층(순자산 100만달러 이상)이 가장 빠르게 성장한 나라로도 꼽혔다. Wealth-X는 최근 ‘부의 10년’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베트남이 2위를 차지했다. 관가와 재계에 포진한 이들 부유층은 보이지 않는 ‘시크릿 인베스터(secret investor)’로 내수 진작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주주로서 어려움에 처한 회사에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증시에서 외국인이 팔고 간 주식을 거둬들이는 식이다.

베트남 정부도 코로나19발(發)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내수 부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6년 이래 대출증가율을 억제했던 정책 기조를 깨고 시중은행을 통한 유동성 확대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 베트남 중앙은행은 이달 중순 근로자 급여 목적에 한해 16조동 규모의 무이자 대출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베트남 정부가 수년 간 외환, 환율, 금융 시장 안정에 주력한 덕분에 아세안 내 다른 국가들과 달리 돈을 풀만한 여력이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 역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피해 권역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GDP의 약 6%이상 기여하는 관광 산업의 붕괴는 베트남 경제에 치명타일 수밖에 없다. 최근 베트남 기획투자부 차관은 “올 1분기 GDP 성장률이 3.8%로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며 “전염병의 지속 시간과 심각성에 따라 25만~4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베트남 경제가 과거처럼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낮다. 국영 기업 민영화, 외국투자기업의 상장 요건 완화 등 그간 미뤄왔던 개혁 과제들을 이번 위기에 해결할 수 있다면 예상을 뛰어넘는 ‘V’자 반등도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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