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맞서 국가 간 협력 등 다자 간 외교를 되살려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더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고립주의 외교로 전환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힘을 키우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메르켈 총리는 31일 배포한 신년사에서 “모든 국가는 국제사회의 문제를 자기 이익에 따라 해결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른 나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국제 협력이 중요하다는 오랜 믿음을 오늘날 모든 사람이 공유하지는 못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과거보다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밝혔다.

또 “우리의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립주의를 비판하면서 국제협력을 강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메르켈 총리는 “인도주의와 개발 원조를 위한 자금을 늘리고 있으며 국방비 지출도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은 국방비 지출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2%에서 2024년까지 1.5%로 늘리고 병력도 2만명 이상 증강할 계획이다. 미국의 국방비 증대 압박에 대응하는 한편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우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주변국에선 독일의 군사력 증강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EU)을 더욱 튼튼하고 제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구로 만들겠다”며 “영국이 EU를 탈퇴한 후에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 정부는 모든 국민이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최상의 해결책을 찾겠다”고 말했다.

2005년 취임해 네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는 메르켈 총리는 “올해가 지난 13년 중 가장 어려운 해였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3월 네번째 임기를 시작한 뒤 한동안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지난 10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 결국 이번 총리 임기가 끝난 뒤엔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