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필리핀의 '마약과의 유혈전쟁'을 놓고 결국 충돌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법치 준수와 인권 보호를 촉구하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이 필리핀 식민지배 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보라고 맞받아쳤다.

9일 필리핀 언론과 AFP 통신 등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전날 오후 라오스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인권문제를 얘기하겠다"며 미국의 식민지배 시절(1898∼1946년)에 살해된 필리핀인 사진을 들어 보였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그들이 살해한 내 조상들"이라며 "왜 우리가 지금 인권에 관해 말하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사전 원고에 없던 두테르테 대통령의 이 발언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겨냥했다.

미국이 필리핀의 인권문제를 거론한 자격이 있느냐고 꼬집은 것이다.

EAS에는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 회원국 등 총 18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예기치 못한 언행에 회의장 분위기가 가라앉고 참석자들이 얼떨떨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외교부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인권에 대한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남아는 지금 테러, 마약, 인신매매 등 비전통적인 안보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각국은 자신들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역사를 고려해 초국가적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리핀에서 지난 6월 말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3천 명 가까운 마약 용의자가 재판도 거치지 않고 경찰이나 자경단 등에 총에 맞아 죽은 마약 소탕전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자 오바마 대통령은 EAS 종료 직후 기자회견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할 것을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테르테 대통령을 별도로 만났을 때 어떤 대화를 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같이 답변하며 "잘못된 방법으로 했을 때 무고한 사람이 다치고 문제를 풀 수 없는 많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직면한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두테르테 대통령은 7일 EAS 참석 정상들의 만찬에 앞서 대기실에서 2분가량 만났다.

오바마 대통령의 '훈계'에 반발해 두테르테 대통령이 EAS에서 작심한 듯 과거 미국의 식민지배를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오바마 대통령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며 인권 보호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양국 정상은 아세안정상회의 첫날인 지난 6일 회담할 예정이었으나 두테르테 대통령의 욕설 파문으로 취소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5일 라오스 방문길에 오르며 "나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오바마가 필리핀의 마약 용의자 사살 정책에 관해 묻는다면) 개XX라고 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kms123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