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한 유적지에서 원시종교 아이콘이 새겨진 4천여년 전의 박 조각이 발견돼 아메리카 대륙의 체계화된 종교 기원이 지금까지 학계 추정보다 1천년 이상 앞서게 됐다. 미국 시카고의 자연사 박물관인 필드 뮤지엄의 북미 고고학 담당 학예관 조너선 하스는 "이는 남북미 대륙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종교 아이콘으로 보인다"면서 "처음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상이 발견됐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하스와 그의 아내인 인류학자 윈프레드 크리머(노던 일리노이대학)를 비롯한 발굴팀은 페루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190㎞ 떨어진 해안지역에서 지난 해 7월 도굴된 공동묘지를 조사하던 중 기원전 2천250년 경의 바가지 파편을 발견했다. 이 지역은 기원전 2천600년에서 기원전 2천년까지 인구가 밀집했던 곳으로 3천500년 후 잉카 문명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곳이다. 문제의 박 파편에는 7.5㎝ 길이의 `창조주'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송곳니가 나온 고양이 같은 얼굴과 발톱 달린 두 발에 한 손에는 뱀을, 다른 손에는 지도자를 상징하는 막대기를 들고 있다. 이같은 형상은 남아메리카 주민들이 수천년 동안 섬겨온 신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다. 하스는 이것이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뚜렷이 인식되는 종교 아이콘"이라고 설명하고 "안데스 지역에서 체계화된 종교가 지금까지 생각됐던 것보다 1천년은 앞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가지로 변형된 이 아이콘은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중남미 전역에서 금과 진흙, 섬유, 돌 등에 등장하고 있으며 15세기 무렵에는 유럽과 접촉을 가진 잉카 부족들이 창조주를 뜻하는 `디라 코차'라고 불렀다.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옛 박들에 아무 장식이 없는 것과는 달리 이 박은 불에 달군 도구를 사용해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의식용으로 무덤에 넣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조한 기후로 보존된 이 바가지는 수프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쓰였을 수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잔류물 분석을 거쳐야 판단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하스 학예관은 이 박 조각이 발견된 지점에서 멀지 않은 다른 무덤에서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또 다른 박 조각이 발견됐으나 아직 탄소연대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문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 요소인 체계화된 종교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이집트나 중국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카고 AFP=연합뉴스) youngn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