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계 금융기관의 파산과 일본의 초장기 불황, 그리고 광우병 파동이라는 삼각파도가 재일교포들을 한꺼번에 덮친 겁니다" 오사카 생활 6년째로 접어든 주재원 K모씨(45). 그는 재일교포가 일본전역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오사카 일대 16만여 교포들을 강타한 경제태풍을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는 교포들 얼굴에 지금처럼 수심이 가득찬 적을 보지 못했다며 "교포들이 수십년 쌓아온 경제적 자립기반이 붕괴 직전에 몰린 것 같다"고 진단했다. 오사카 외곽을 한바퀴 도는 환상선 전철과 긴테쓰 전철이 교차하는 쓰루하시역. 교포상인들의 5백여 점포가 밀집해 있는 역전 시장에서 한복가게를 하는 S상회의 K씨는 "장사 잘 되느냐"는 질문에 "잘 될 턱이 있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교포사회에서 설날을 지내는 풍습이 시들해지기도 했지만 요즘처럼 한복가게가 죽을 쑤기는 처음이라는 그는 "작년초부터 매출이 계속 내리막길"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환갑잔치나 결혼식때는 그래도 교포들이 옷을 해 입었는데 이제는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예전의 반도 안 해 입어요" 야키니쿠(고기를 일본식으로 구운 음식) 식당 '백운대'의 오상빈 대표(60)는 일본땅에서 30년 가까이 장사하면서 지금처럼 손님얼굴 보기 힘든 때가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점포가 2개인 그의 식당은 쓰루하시 일대에서 손님 많기로 첫 손가락에 꼽는 곳이었다. 7백만엔을 넘어섰던 월 매출은 작년 10월부터 3백만엔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18명의 종업원을 절반으로 줄였지만 매출은 회복되지 않고 적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았지만 그래도 교포금융기관인 간사이고긴(關西興銀)이 버티고 있을 때는 급한 돈을 쉽게 빌려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났습니다. 일본은행들이 어디 돈을 호락호락 빌려 주나요"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의 이상균 고문(65)은 간사이고긴이 파산처리된 후 광우병 파동까지 겹쳐 교포기업과 상점들은 극심한 돈 가뭄에 허덕이고 있다고 밝혔다. 부동산 임대업체의 사장이기도 한 그는 "간사이고긴이 버틸 때는 돈을 갖다 쓰라던 일본은행들도 간사이고긴이 무너진 후 태도를 확 바꿨다"며 4만여 교포세대의 앞날이 큰 일이라고 말했다. 간사이고긴이 2000년 12월 무너진 후 오사카의 이쿠노구와 히라노구에 밀집한 교포 중소기업들 역시 금융사각지대로 내몰렸다. 오사카 한인상공회의소의 장철남 국장은 "회원사 교포기업인과 상인들에게 안부 묻기가 두렵다"며 "도산했거나 문을 닫았을지 몰라 전화 걸기도 조심스럽다"는 말로 교포사회의 위기감을 전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교포사회의 더 큰 걱정은 현재의 시련보다 경제적 파워의 완전한 붕괴에 있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간사이고긴이 일본정부 관리하에 있던 지난 1년3개월간 교포들의 자금거래 내역과 증식방법, 이동상황 등에 관한 정보가 모두 드러난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이라고 말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교포지갑이 유리알처럼 돼 버렸다"며 "일본 세무당국의 압박이 두려워 재력가들이 국적을 바꾸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 경우 경제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일본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온 교포들의 위상이 대폭 약화될 것"이라며 "이는 한.일관계에도 중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오사카=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