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에 빠진 여신전문금융채권 시장이 ‘50조원+α’ 규모의 지원을 약속한 정부 대책에도 온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달 들어 여전채 발행액은 반 토막 났고 꽉 막힌 유통시장에선 국고채 대비 2%포인트가량 금리를 더 얹어줘야 겨우 팔리는 형국이다. 자금 조달이 막힌 금융회사들은 기업어음(CP),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을 대폭 늘린 데 이어 외화채권 발행으로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10월 여전채 발행액 60% 감소
26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25일까지 국내 신용카드·캐피털사가 발행한 채권 규모는 모두 8457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같은 기간(2조1380억원)보다 60% 급감했다. 같은 기간 할부금융채 발행액은 1조1080억원에서 5957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카드채는 1조300억원에서 2500억원으로 4분의 1 토막 났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지난달 말부터는 금리가 오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정말 급한 자금이 아니면 발행할 엄두도 내기 어렵다”며 “최근엔 여전채 수요도 말라붙어 높은 금리를 주고 발행이라도 되는 곳은 다행이란 말이 나올 정도”라고 했다.
올 들어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지면서 안 그래도 급등하던 여전채 금리는 지난달 28일 ‘레고랜드 사태’ 이후 천장을 모르고 치솟았다. AA- 등급 3년 만기 여전채 금리는 지난 21일 기준 연 6.35%까지 올랐다. 2010년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다. 1년 전 0.3%포인트 안팎이었던 여전채와 국채 간 격차(스프레드)도 올 6월 0.9%포인트에 이어 최근에는 1.6%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자금을 채권시장에 지원하겠다고 한 뒤 금리 상승세는 겨우 멈췄지만 시장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이날 잔존 만기 4개월짜리 KB캐피탈 채권은 국고채 대비 2.039%포인트 높은 연 6.393%에 거래됐다. 안전자산인 국채에 비해 얹어줘야 하는 금리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외화채로 조달 돌파구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여전채는 12조2645억원 규모에 달한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순발행은커녕 만기가 돌아오는 물량을 어떻게 막을지도 막막한 상황”이라고 했다. 여전채 발행이 막힌 금융사들은 단기 CP에 이어 ABS 발행도 대폭 늘리고 있다. 당장 현금화가 어려운 자산을 쪼개 증권화한 ABS는 담보가 있는 만큼 급전이 필요할 때 발행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올 3분기 카드·캐피털사 ABS 발행액은 총 4조3000억원으로 작년 동기(1조6000억원)의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외화로 돈 빌리기에 나서는 금융사도 늘고 있다. 현대캐피탈은 이날 일본에서 200억엔(약 1930억원) 규모의 엔화 표시 채권, 일명 사무라이 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발행 금리는 1년6개월 만기가 연 0.98%, 3년 만기가 연 1.21%였다. 지난 13일 현대캐피탈이 국내에서 발행한 3년 만기 채권의 금리가 연 5.788%였음을 고려하면 조달 비용을 대폭 낮춘 것이다. 현대캐피탈이 사무라이 본드를 발행한 것은 2018년 8월 이후 약 4년 만이다.
신한은행도 14일 0%대 금리로 320억엔(약 3086억원) 규모의 사무라이 본드를 찍었다. 3년 만기 금리는 연 0.98%였다. 하나은행은 호주달러 채권인 캥거루 본드 발행을 위한 수요 예측에 들어갔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조달 환경이 흉흉하다 보니 초저금리가 유지되고 있는 일본과 발행 절차가 유연한 호주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고 했다.
신용등급 AAA급 공기업들이 채권 발행에 잇따라 성공했다. 높은 신용도를 확보한 우량 채권을 중심으로 투자 수요가 다소나마 회복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유동성 경색을 초래한 단기자금 시장에서는 50조원을 공급하겠다는 정부 대책의 효과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2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한국도로공사(AAA급)는 이날 열린 공사채 입찰 결과 2년물 1400억원, 3년물 500억원 등 총 1900억원어치를 발행하기로 했다. 목표 물량(2년물 500억원, 3년물 500억원)을 훌쩍 넘는 매수 주문이 들어오면서 발행 금액을 늘렸다.한국공항공사(AAA급)도 총 1400억원어치 공사채 발행을 결정했다. 대신 발행 금리는 크게 올랐다. 2·3년물 모두 연 6% 수준에서 낙찰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AAA급 공사채 금리가 연 6%대를 넘어섰다.다만 한국전력(AAA급)이 발행하는 한전채는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했다. 2000억원 모집에 2년물 600억원어치를 연 5.9%에 발행하는 데 그쳤다.IBK투자증권은 25일 부산항(북항) 상업업무지구 개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채권을 유동화한 6개월물 ABCP를 연 8.05%의 고금리로 발행했다. 한국투자증권이 SK온의 미국·헝가리 배터리 공장 증설자금 대출을 담보로 발행한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는 이자율이 지난달 연 3.5%에서 이번주 연 6.7%까지 치솟았다.단기자금 시장 경색이 심화하면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와 CP 금리가 역전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91일물 CP 금리는 24일 연 4.37%로 마감했다.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한 2020년 이후 처음으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연 4.305%)를 넘어섰다.장현주/이현일 기자 blacksea@hankyung.com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금융시장 불안 사태와 관련해 레고랜드 채무보증 불이행을 선언한 김진태 강원지사를 26일 집중 공격했다. 이번 사태를 ‘김진태발 금융위기’로 규정하고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원인을 따진다는 방침이다.이재명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김진태 사태’는 무능·무책임·무대책 ‘3무(無) 정권’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 사례”라며 “지방정부의 채무 불이행 선언, 부도 선언으로 대한민국 자금시장에 대혼란이 초래되고 있다”고 직격했다. 그는 “만약에 이재명의 경기도가 그랬다면 직권남용으로 바로 수사했을 거 아니냐”며 “감사원은 어처구니없는 감사를 하면서 강원도 조치에 대해서는 왜 감사하지 않는 것이냐. 검찰, 경찰은 왜 수사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민주당은 이날 ‘윤석열 정부 경제 참사 김진태 사태 자금시장 위기 대응’ 긴급토론회를 여는 한편, 이 대표 지시로 당 차원의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민주당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 소속 의원들도 합세해 “검찰 출신인 대통령과 강원지사가 경제를 망치고 있다”며 김 지사 사퇴를 촉구했다. 당 대표 사법 리스크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여당 출신 강원지사의 실책을 적극 공략해 민심을 끌어오겠다는 포석이다.전날 민주당의 대통령 시정연설 보이콧에 이은 ‘김진태 공방’으로 이번 주 시작된 예산 정국도 얼어붙고 있다. ‘초부자 감세 저지’를 기치로 내건 민주당은 이날 내년도 예산안 대응 워크숍을 열고 예산 심사 방향을 논의했다. 특히 예산 심의 관련 10대 요구 과제에 △노인·청년 일자리 창출 △중소상공인·지역경제 회생 △공공주택 확충 예산 등을 포함시켰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최고위 회의에서 “60조원 초부자 감세와 1조원 넘는 대통령실 이전 예산을 반드시 막겠다”고 강조했다.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며 내년 정부 예산안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긴축하면서도 쓸 곳은 쓰는 예산’이라고 맞받았다. 성일종 정책위원회 의장은 이날 라디오에서 “한두 개 수치를 뽑아서 전체인 것처럼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
“지금 금융회사들이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금리가 더 오를 게 뻔하니 굳이 무리해서 (채권을) 살 이유가 없는 거지요.”국내 대형 보험사의 한 채권 담당 펀드매니저는 채권시장의 현재 상황을 이같이 진단했다. 지난달 말 강원도의 레고랜드 지급보증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로 촉발된 자금경색 국면이 ‘50조원+α’ 규모의 정부 지원 대책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은 시장 참여자들의 유동성 선호가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27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국공채에 제한된 한은 대출의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은행채 등을 추가하는 방안 시행 여부가 결정되고, 다음달 1~2일 미국 중앙은행(Fed)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 향방이 정해지고 나서야 금융당국의 각종 시장 안정 조치가 제 기능을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2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들어 25일까지 장외 채권시장에서 거래된 회사채 유통액은 7조5627억원으로 전달(12조8898억원)보다 41.3% 줄었다. 8월(16조2779억원)에 비해선 절반 아래로 쪼그라들었다. 지난 14~20일 신용등급 A등급 회사채의 유통금액은 705억원으로 한 달 전(9월 16~22일)과 비교해 80.7% 급감했다.다급해진 정부가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대책을 발표했지만 그 이후에도 우량 공사채가 계속 유찰되는 등 자금경색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이는 2년 전인 코로나19 위기 당시와 다른 모습이라는 평가다. 2020년 3월 국내 일부 증권사들은 글로벌 증시 급락으로 주가지수 연계 파생결합증권(ELS)의 대규모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부 요청)에 직면해 ‘흑자 도산’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때맞춰 ‘125조원+α’ 규모의 금융지원 대책이 발표되자 시장은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시만 해도 미국이 ‘제로 금리’ 정책을 펴면서 세계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시중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며 “게다가 Fed의 기준금리 추가 인상 기대가 팽배한 상황에서 누가 떨어지는 칼날을 선뜻 잡고 싶어 하겠느냐”고 했다.이에 따라 27일 금통위와 다음달 1~2일 FOMC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Fed가 이번 FOMC에서 기준금리를 다소 올리더라도 향후 인상 속도와 폭에 대한 불확실성이 걷히면 채권시장 유동성 위기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이호기/이인혁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