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는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인 데다 수익률까지 높다.”

세계 투자자들이 미국 달러화 보유를 늘리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우려로 주식,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 가격이 크게 내리고 있어서다. 전통적인 안전자산으로 여겨져온 일본 엔화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달러 가치는 올 들어 8% 이상 올랐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미국 주식과 채권을 팔더라도 달러만큼은 자국 통화로 환전하지 않고 있다.

최고 안전자산 부각

큰손들, 美주식·채권 팔아도 달러는 안 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자들이 포트폴리오에서 달러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세계 16개 통화 대비 미국 달러 가치를 측정하는 WSJ 달러인덱스는 올 들어 이날까지 8.5% 올랐다. 최근 1년간 상승률은 11.5%에 달한다. 미국 증시 등이 급락한 것과 대비된다.

영국 은행 스탠다드차타드의 스티브 잉글랜더 전략가는 “달러 강세는 적어도 몇 달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며 “달러 가치는 5% 추가 상승할 여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양적긴축)에 나서고 있어 달러 강세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위험자산과 안전자산 모두 흔들리고 있는 것도 달러 가치가 부각되는 이유다. 세계 중앙은행들이 긴축에 나서자 주식,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 가격이 출렁이고 있다. 원유 등 원자재 역시 경기에 민감해 가격 변동폭이 크다. 금리가 오르자 전통적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 가격도 하락하고 있다.

결국 세계 투자자들은 미국 주식과 채권을 팔아 확보한 달러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고 WSJ는 분석했다. 달러 자체가 투자자산으로서 가치가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미국 주식 및 채권 시장에서 차익을 실현한 뒤 자국 통화로 환전 및 송금했던 과거와 다른 행태다.

WSJ는 “해외 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달러 규모가 조만간 사상 최대 액수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미국으로 들어오는 달러 순유입액은 지난 3월 3012억달러에 달했다. 조만간 전고점인 2020년 7월의 3587억달러를 넘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엔화와 스위스프랑은 약세

외환시장에서도 달러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 시장이 위기를 맞았을 때 달러와 함께 피난처로 여겨졌던 일본 엔화와 스위스프랑은 최근 약세를 보이고 있다. 같은 날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136엔까지 떨어졌다. 지난 1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135엔까지 하락했던 엔화가 추가로 약세를 나타내며 1998년 10월 이후 2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3%포인트 안팎까지 벌어지면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투자자가 늘어난 영향으로 분석된다.

Fed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가파른 금리 인상에 나선 반면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완화를 유지하면서 금리 차가 확대되고 있다. 일본 통화당국이 구두 개입 외에는 환율을 방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의 피난처로 미국 달러만 한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플레이션 국면에서는 현금 가치가 저평가되지만,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 상황은 상대적으로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하고 있다. 조지 사라벨로스 도이체방크 전략가는 “달러는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헤지(위험 회피) 수단으로 역할을 해왔다”며 “이번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고운 기자/도쿄=정영효 특파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