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 900원선 붕괴 코앞…수출 전선에 비상등

'엔저(円低·엔화가치 약세)'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원·엔 환율이 7년여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그만큼 올랐다는 뜻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엔당 900원선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2일 오후 3시 기준 원·엔 재정환율은 오전 6시 뉴욕시장 대비 2.54원 내린 100엔당 902.86원을 나타냈다.

원·엔 재정환율이 이처럼 낮아진 것은 2008년 2월 28일 100엔당 889.23원(종가 기준)을 기록한 이후 7년 2개월 만이다.

원·엔 환율은 2012년 6월만 해도 100엔당 1,500원대였지만, 아베노믹스가 본격화된 이후 하락세를 이어왔다.

불과 2년 10개월 만에 엔화 대비 원화 값이 60%가량 절상된 것이다.

이는 일본 업체들과 경쟁하는 우리 수출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고스란히 작용해 안 그래도 부진한 수출 전선에 '적신호'가 되고 있다.

◇ 외국인 자금 증시 유입이 환율엔 '악재'

원화의 상대적 가치가 더 오른 것은 최근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의 순매수가 증가하면서 원화 가치의 절상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원화와 엔화는 시장에서 직접 거래되지 않아 달러화 대비 가치를 비교한 재정환율로 두 통화의 상대적 가치를 따진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엔저가 특별히 더 심화된 것은 아니더라도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유지하게 되면 원·엔 환율은 하락한다.

원화 가치가 높아지는 셈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22일 오후 3시 기준으로 달러당 119.5엔으로, 지난달 10일 고점(달러당 122.0엔)에는 미미치 못한 상태다.

원·엔 환율은 그동안 양적완화를 기반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영향으로 엔저현상이 심화하는 기조 속에서도 100엔당 910원선을 심리적 저항선으로 두고 그 이상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난 16일 이후 5거래일 연속 원화가 엔화 대비 강세를 보이면서 원·엔 환율은 하단을 낮춰왔다.

원·엔 환율 하락 배경에는 무엇보다 국내 증시에 몰려드는 외국인 투자자금이 자리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2거래일 연속 순매수를 이어가며 이달 들어서만 3조원 이상을 들여왔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부문장은 "글로벌 자본 유동성이 늘어난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신흥시장에 외국인 자본 유입이 늘었고, 이것이 환율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일본이 공격적인 완화정책을 수행하면서 그 여파로 엔화가 저평가됐다"며 "반면에 한국 통화당국의 스탠스는 외환시장 참여자들이 완화정책를 꺼리는 것으로 해석하게 만들어 원화 강세를 촉진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재무부가 한국 외환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지나치다는 내용의 환율 보고서를 낸 것도 일부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그동안 100엔당 910원을 우리 정부가 지지할 방어선으로 여기고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을 경계해 왔다.

그러나 미 재무부의 보고서 발표 이후 우리 당국의 미세조정이 한층 소극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해졌는데, 이것이 원화 가치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부진한 수출에 '설상가상'…"정책수단 마땅히 없어"

100엔당 900원선이 깨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한국의 수출경쟁력은 설상가상으로 더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한국은행은 이달 내놓은 경제전망보고서에서 올해 수출규모(통관기준)를 작년보다 1.9% 감소한 5천620억 달러로 예측했다.

국제유가 하락과 중국 경기 둔화 우려도 고려됐지만, 엔저에 따른 한국제품의 가격경쟁력 하락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엔화 약세는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100엔당 900원선이 일단 깨지면 올해 안으로 100엔당 800원대 중반까지 깨질 수 있다고 본다"며 "현재 수출 증가율이 3개월 연속 마이너스인데 하반기 들어서는 마이너스 폭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원·엔 환율이 100엔당 평균 900원대까지 떨어지면 연평균 총수출이 8.8%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며 "일본과 우리 기업의 수출 경합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엔저 해결에 뾰족한 정책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신민영 연구부문장은 "엔저 대책은 자칫하면 외환시장 개입이 될 수 있다"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조정에 대해서도 우려할 점이 많아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를 내놓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준협 실장은 "정부가 원·엔 환율을 조정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다"며 "각 기업이 제품 경쟁력, 서비스 경쟁력을 챙기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다만 정부가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수출금융이 어렵지 않도록 도와주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고동욱 김수현 기자 p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