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권(父權)이 소멸하면 가족은 망가진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선 다른 누군가가 부권을 떠맡아야 한다. 가정의 질서를 세워 가족을 보호하는 "경찰"이 필요한 탓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넨바움"은 뉴욕에 사는 테넨바움 가족 얘기를 통해 부권상실의 시대에 아버지의 역할과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다분히 고전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지만 코믹하고 엉뚱한 현대적 스타일로 포장돼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진 해크먼을 비롯 안젤리카 휴스턴,벤 스틸러,기네스 펠트로,루크 윌슨,오웬 윌슨 등 호화 배역진이 저마다 개성적인 캐릭터를 선보인다. 유명변호사 로얄 테넨바움과 에슬린의 "천재" 삼남매는 10대에 "자본주의메카"인 뉴욕에서 성공을 보장받았다. 채스는 금융전문가로,마고는 극작가로,리치는 테니스스타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20여년후 채스는 매일 집에서 두 아들과 소방훈련을 하면서 소일하고,마고는 결혼생활에서 따분함과 권태를 느끼며,리치는 떠돌이로 살아간다. 왜? "아버지의 실패"가 원죄다. 로얄은 리치를 편애해 다른 자녀들에게 상처를 안겨줬고 불성실한 행실로 아내와는 별거했다. 또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랜 방랑생활끝에 파산한 로얄은 20여년만에 불치병을 핑계삼아 돌아와 망가진 가족을 재건하려 든다.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작품이 의도하는 바는 뚜렷하다. 가족은 상처의 진원지일 수 있지만 치유를 위해 돌아가야 할 곳이다. 가족을 떠나 전전하는 인생이란 "고물택시"와 진배없다. 영화속 택시들은 하나같이 "집시"회사 소속이며 폐차장에 보내져야 할 정도로 낡았다. 택시는 "이동의 상징"이자 "정주못한 인생"을 대변한다. 로얄이 호텔의 장기투숙객에서 벨보이로 자리바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유목민보다는 소박한 정착민이 되겠다는 각오다. "가족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로얄의 이런 노력으로 자녀들은 서서히 자신감과 자존심을 되찾아간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로얄역의 진 해크먼은 가족들의 화해를 위해 괴팍한 성질을 과장된 유쾌함으로 누른다. 에슬린역의 안젤리카 휴스턴은 불치병의 남편앞에서 동정심과 분노가 교차한다. 마고역의 기네스 펠트로는 지나치게 조숙해 열정이 빨리 식어버렸다. 장남역의 벤 스틸리는 아버지를 만나면 무조건 화를 내지만 그것을 관객들이 웃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연기했다. 모든 캐릭터들은 실제보다 다소 과장돼 있다. 로얄의 웃음외에 다른 인물들은 "공포가족"을 연상시킬 정도로 시무룩하거나 험살궂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불행을 시위한다. 자녀들은 성년이 된 후에도 어린시절의 복장을 그대로 입고 있다. 다혈질의 채스는 빨강 트레이닝복,마고는 라코스테 원피스,리치는 테니스스타를 연상시키는 머리밴드와 필라T셔츠를 걸친다. 이는 유년기에 형성된 성격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20여년간의 "망가진 세월"은 인생에서 "부재의 시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29일 개봉. 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