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의 가늠자 역할을 해 ‘닥터 코퍼’로 통하는 구리 가격이 최근 석 달 새 24.1% 올랐다. 하지만 또 다른 ‘경기 바로미터’인 해상운송료 지표는 추락을 거듭해 석 달 새 42.1%나 빠졌다. 시장에서는 기업들이 체감하는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기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산업·경제 지표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어서다.
아연·알루미늄 가격도 뜀박질
30일 한국광물자원공사에 따르면 구리 현물은 지난 27일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t당 9345.5달러에 거래됐다. 전 거래일보다 57달러(0.61%) 올랐고, 최근 석 달 새 24.1%(1820.5달러) 뛰었다. 건축과 설비, 송전 등에 두루 쓰이는 구리는 대표적인 경기 선행지표로 통한다.
구리 가격은 지난해 3월 t당 1만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지만, 이후 내림세를 지속하면서 지난해 7월 7000달러대로 떨어졌다. 이후 등락을 거듭하다 석 달 전 오름세로 전환했다. 구리와 함께 대표 비철금속인 아연과 알루미늄도 최근 석 달 새 각각 27.4%, 18.2% 뜀박질했다. 철광석 가격도 27일 t당 122달러로 석 달 전보다 48.3% 올랐다.
금속 가격을 비롯한 경기 선행지표가 나란히 오름세를 보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경기가 뚜렷한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최근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보다 1.3%포인트 하향 조정한 1.7%로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금속 가격이 뜀박질한 것은 중국이 부동산 부양책을 추진한 것과 맞물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말 중국 정부가 발표한 14차 5개년 계획에는 주요 인프라 건설사업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의 건설 자재 씀씀이가 커지면서 관련 금속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는 논리다.
원자재 가격과 함께 달러 가치도 안정세를 되찾고 있다. 유로 엔 파운드 등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27일 101.93으로 석 달 새 7.83% 내렸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뜻을 밝히면서 시장 유동성 흐름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됐다.
해상운임은 내림세, 금값은 오름세
‘침체’를 가리키는 산업 지표도 적잖다. 글로벌 해상운임 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 20일 전주보다 1.67포인트 내린 1029.75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치인 지난해 1월 7일(5109.6)의 5분의 1 수준이다. 조만간 1000선이 무너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해상운송료가 빠지는 것은 제품 수출·수입이 부진할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한국은행은 올해 세계 교역량 증가율을 2.3%로 내다봤다. 2021년(10.1%)의 4분의 1, 2022년(4.2%)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가 나빠질 것이라는 지표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수출 주도 성장 체제인 한국의 무역지표는 세계 경기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올 들어 한국의 무역지표는 최악 수준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무역수지(수출-수입)는 102억63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 같은 추세라면 1월 무역수지 적자 폭은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것이 유력하다. 종전 최대 적자는 지난해 8월의 94억3500만달러다.
안전 자산으로 통하는 금값이 사상 최고치에 근접한 것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서다. 27일 런던 금시장에서 금 현물은 트로이온스당 1923달러로 석 달 전보다 17.3%나 뛰었다.
이런 엇갈리는 흐름에 기업들의 희비도 교차하고 있다. 금과 구리, 아연, 알루미늄 가격이 뜀박질하면서 비철금속을 생산하는 고려아연 영풍 LSMnM(옛 LS니꼬동제련) 풍산 등은 실적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해상운송료가 추락하면서 HMM을 비롯한 해운사 실적은 나빠질 전망이다. HMM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는 작년보다 73.46% 감소한 2조6629억원으로 집계됐다.
광양제철소는 강판에 아연을 전기도금 하는 2EGL(Electrolytic Galvanizing Line·전기아연도금라인) 공정이 25년 4개월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지난 19일 폐쇄했다고 30일 밝혔다광양제철소는 1997년 8월 27일 2EGL공장 가동을 시작한 뒤 25년간 세계 최고 수준의 컬러 강판과 내지문(지문 방지)제품을 생산해 이달까지 총 680만t의 제품을 생산했다.2EGL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들은 TV,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에 필수적인 가전제품으로 변신해 전 세계인의 안방, 거실 등에서 수십년간 역사를 함께 해왔다.광양제철소 관계자는 "2EGL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은 아주 얇게 도금돼 가공성이 우수할 뿐 아니라 철저한 품질관리와 기술력을 갖췄다"며 "균일하고 미려한 표면을 자랑해 국내외 고객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다"고 설명했다.하지만 광양제철소는 최근 세계 철강 시장의 흐름과 무방향성 전기강판 같은 새로운 소재 생산을 고려해 올해 1월 조업 중단을 결정했다.2EGL공장에서 생산하던 제품들은 광양 1EGL공장과 포항 1EGL, 2EGL에서 라인별 특성에 맞춰 생산할 계획이다.광양제철소는 앞으로 1조원을 투자해 연간 30만t 규모의 전기강판 공장을 2025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광양=임동률 기자
1879년 출범한 미국 2위 석유기업 셰브론. 이 회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전세계 알짜 유전을 대거 쥐고 있다. 땅만 파면 기름이 흘러나오는 유전을 굴리는 이 회사는 국제유가가 뜀박질하면서 작년에만 40조원 넘는 순이익을 거뒀다.셰브론은 엑슨모빌 셸, BP, 토탈, 코노코필립스, 에니와 함께 전세계 에너지 시장을 주무르는 에너지기업인 이른바 '세븐시스터즈(Seven Sisters)'멤버로 꼽힌다. 이들은 작년에만 2000억달러(약 250조원)대의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유전·광구 없는 한국 정유사는 비싸게 원유를 들여와 기름을 만들어 판매하는 탓에 수익률이 낮다. 미국·영국 에너지 기업의 원유 판매수익을 일부 회수하는 횡재세(windfall tax·초과이윤세)를 한국 정유업체에 부과하는 것은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이란 비판이 나온다.30일 셰브론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액 2462억5000만달러(약 302조8900억원), 순이익 354억6500만달러(약 43조6200억원)를 거뒀다.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은 14.4%를 기록했다. 셰브론을 비롯한 세븐시스터즈는 지난해 2000억달러대의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반면 한국 정유사의 순이익은 다 합쳐도 5조원 안팎에 머무른다. 순이익은 물론 이익률도 세븐시스터즈와 비교도 못 할 만큼 낮다. 금융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한국의 대표 정유업체인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매출액과 순이익 추정치는 각각 79조7978억원, 2조8583억원으로 집계됐다. 순이익률은 3.6% 수준이다. 이 회사 순이익은 셰브론과 비교해 14분의 1 수준이다. 이익률은 4분의 1 수준이다.한국 정유사들의 수익구조가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 비교해 취약한 것은 유전·광구 없는 탓이다. 셰브론의 작년 석유 시추 등 자원개발(다운스트림) 사업 순이익은 302억840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 회사 전체 순이익의 85.4%에 달했다.반면 한국은 알짜 유전이 거의 없다. SK이노베이션이 일부 유전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기서 나오는 순이익은 2021년 기준 132억원에 불과했다.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한 한국 정유사들은 해외에서 원유를 들여와 끓여서 만든 석유제품을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정제마진(석유제품에서 원유 가격을 뺀 수익)에 의존하는 사업구조다. 국제유가가 뛰면서 실적이 큰 폭 오른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는 사업구조가 완전 다르다.영국과 미국 정부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실적이 불어난 셰브론 등 에너지 업체에 세금을 매기는 횡재세를 추징 중이다. 한국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을 중심으로 한국 정유업체에 횡재세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전을 굴리는 글로벌 에너지기업을 표적으로 하는 횡재세를 한국 정유사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일각에서는 야권이 난방비 폭탄의 책임을 기업의 돌려 성난 민심을 무마하는 한편 물가지원금 명목으로 돈을 살포하려는 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이 현실화할 경우 되레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상당하다. 정유업체의 투자심리를 꺾어 되레 기름값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삼성그룹 오너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사진 왼쪽부터)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이달 주식 담보대출로 1조8240억원을 조달했다. 보유한 삼성전자·삼성물산 상당수를 증권사 등에 맡기고 신용대출을 받았다.이들의 신용대출 금리는 지난해 두 배가량 뜀박질하면서 연 5~6%대까지 치솟았다. 연간 이자비용도 871억원으로 지난해 초와 비교해 300억원가량 불었다. 삼성그룹 오너일가도 치솟는 금리부담이 가볍지 않은 셈이다.3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이부진 사장은 이달 중순 하나증권·교보증권·현대자증권과 삼성전자·삼성물산 주식 담보대출 계약을 연장했다. 계약을 연장하는 과정에서 대출금리가 연 3.39~4.5%에서 연 5.65~6%로 뛰었다.이 사장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주식 각각 955만3000주(대출금 3200억원), 465만6000주(3300억원)를 맡기고 총 6500억원을 빌렸다. 지난해 4월 연 2.1~4% 수준인 담보대출 금리가 연 6%까지 치솟으며 이자비용은 두 배가량 불었다. 홍라희 전 관장과 이서현 이사장의 사정도 비슷하다. 홍 전 관장은 삼성전자 주식 2270만5000주를 하나은행 등에 맡기고 8500억원을 빌렸다. 현재 주식담보대출 금리는 연 3.47~5.64% 수준이다. 지난해 4월 금리(연 2.67~2.77%)와 비교해 두 배가량 올랐다. 이서현 이사장도 삼성물산 주식 442만8311주를 하나은행과 한국증권금융 등에 맡기고 3240억원을 빌렸다. 대출 금리는 작년 4월 연 2.77~4%에서 현재 연 3.47~6%로 올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주식담보대출이 없다.올 1월 금리 기준으로 삼성그룹 오너가의 이자비용은 연간 기준으로 871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에 비해 단순계산으로 연간 300억원가량 불어날 전망이다.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홍라희 전 관장(7조400억 원)과 이부진 사장(약 5조8000억원), 이서현 이사장(약 5조500억원)은 이재용 회장에 이어 한국 주식 부호 순위에서 2~4위를 나타냈다.이들의 주식담보대출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과 관련한 상속세 용도로 해석된다. 이건희 회장은 주식·부동산·미술품 등 약 26조원의 유산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상속세율이 60%에 달하는 만큼 삼성가가 상당한 차입금을 조달한 것으로 관측된다.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