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벤처캐피털(VC)업계의 화두는 유통 분야 플랫폼기업을 뜻하는 이른바 컨슈머테크였다. 지난해에만 투자액 3조5000억원이 몰리면서 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패션 플랫폼의 인기가 높았다. 매출 200억원 이상 주요 9개 기업의 거래액이 7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활성화함에 따라 무신사는 몸값이 코스닥시장 6위(펄어비스 3조8144억원)와 맞먹는 3조8000억원에 달했다.

흔들리는 신뢰

이랬던 분위기가 올해 들어 180도 바뀌었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주요국의 ‘빅스텝’ 금리 인상으로 자본시장이 급격히 냉각하면서 VC업계에선 “몇몇 패션 플랫폼기업은 전주(錢主)를 찾아 백방으로 뛰는데, 투자하겠다는 곳이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톱스타 앞세운 광고가 毒 됐나…패션플랫폼 '투자 파티' 끝났다
자본시장 위축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출혈을 불사하며 ‘몸집’을 불리는 성장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투자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발표된 주요 기업의 지난해 감사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1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매출 200억원이 넘는 9개 패션 플랫폼의 지난해 영업손실은 2050억원으로 전년(851억원)보다 2.4배 불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무신사(영업이익 541억원)와 W컨셉(30억원)을 제외하고 전부 영업손실을 냈다.

적자 기업 모두 연중 할인 정책과 유명 연예인을 활용한 TV 광고 등으로 영업선전비가 급증한 게 실적 악화의 핵심 요인이다. 줄줄이 200억~3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명품 플랫폼이 특히 그렇다.

발란은 김혜수, 머스트잇은 주지훈, 트렌비는 김희애 등 수억원대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했다. TV와 옥외 전광판이 명품 플랫폼 광고로 도배되면서 트렌비와 발란은 작년 광고비 지출 상위 50위 안에 들기도 했다.

그 결과 트렌비는 지난해 광고선전비로 298억원, 발란과 머스트잇은 각각 191억원과 134억원을 지출했다. 전년 대비 3~7배 늘어난 금액이다. 발란 관계자는 “인지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광고비용이 늘었다”며 “광고비를 제외하면 판매관리비 가운데 다른 내역은 안정적으로 관리 중”이라고 설명했다.

1년 내내 할인 쿠폰을 뿌려 대는 연중 세일 방식의 마케팅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브랜디는 지난해 영업손실(480억원)이 전년(197억원)의 두 배로 급증하자 쿠폰 발행을 축소하기도 했다. 정보기술(IT) 개발자의 몸값이 높아지고, 배송 물량이 늘어나면서 임금과 지급수수료 지출이 급증하는 것은 다른 e커머스기업이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어려움이다.

보수적으로 변한 투자자들

VC업계는 패션 플랫폼들이 ‘성적’으로 자신들의 몸값을 입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 투자 유치와 기업공개(IPO)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시장 급랭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VC업계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맬 태세인데, 패션 플랫폼이라고 무풍지대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시장정보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 1분기 미국 내 벤처캐피털 투자 규모는 작년 4분기에 비해 2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연 1조원이 넘던 스타트업 투자가 지난 3월부터 감소하는 추세다. 2월 1조6156억원에 달하던 투자금은 4월엔 절반 수준인 8811억원으로 떨어졌다.

박종대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IPO가 난관에 봉착하면 패션 플랫폼들은 매각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며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지그재그와 W컨셉이 각각 카카오스타일과 이마트에 매각된 게 예고편일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