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 2022'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사진=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 2022'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사진=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인 'CES 2022'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2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재개된 올해 CES에는 1300여개 기업이 참가한 미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로 많은 500여개 기업이 참여했다.

전시 제품 가운데 623개가 CES 혁신상을 받았는데, 이 중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 139개나 된다. CES에서 선정한 혁신 제품 5개 중 1개 이상꼴로 한국 기업이 만든 셈이다. 현지 IT 매체 '더버지' 등이 "올해 CES에서 가장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은 곳들이 대부분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CES 부스 현장에서 느낀 한국 기업들의 분위기는 '설렘 반, 씁쓸함 반'이었다. 해외 바이어와 소비자들에게 기술력을 선보이고 제품을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선 들뜬 모습이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관련 규제가 막고 있는 사업 환경에서 언제 상용화될지 모르는 연구개발(R&D)에 매진해야 해 한편으로는 허탈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일례로 국내 스타트업 기업 콥틱은 어플리케이션(앱)으로 이용자의 얼굴형을 분석하고 사이즈를 파악한 뒤 맞춤형 안경을 추천·판매하는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국내에선 '불법'이다. 우리나라에선 안경의 비대면 판매를 금지하고 있어서다. 이 기업은 현재 미국에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스마트 센서가 달린 기저귀 관리 시스템을 개발한 국내 벤처기업 모닛도 국내 '원격 의료' 규제 때문에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제품을 출시했다.

올해 CES에서 혁신상을 받은 미국 헬스케어 기업 덤테크의 피부암 진단 서비스도 국내에선 할 수 없다. 소비자가 피부에 붙였다 떼어낸 패치를 우편으로 보내면 3일 안에 유전자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서비스지만, 국내에선 병원을 거치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업 관계자는 "아시아에선 관련 규제가 없는 싱가포르 등에서 서비스할 예정"이라고 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CES에서 공개한 다용도 소형 모빌리티 플랫폼인 '모베드(MoBED)'를 2년 후 소비자에게 선보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각 바퀴가 독립적으로 움직여 기울어진 도로나 요철에서도 원하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 물류 현장을 비롯해 유모차, 무거운 짐을 들기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국내 도로교통법 등에 따르면 자율주행 로봇은 자동차로 분류돼 인도와 횡단보도를 다닐 수 없게 돼 있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르지만 자율주행 로봇을 차와는 다르게 분류해 제도적으로 활용도를 높인 케이스도 있다.

현대차에서 로봇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현동진 로보틱스랩 상무는 "모베드의 경우 양산 시점을 2년 뒤 정도로 생각한다"며 "2년 동안 현대차가 챙겨야 할 것들 중 대표적인 게 내구성, 안전, 규제 등이다. 특히 규제는 개발 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장에서 둘러본 올해 CES의 트렌드는 누가 뭐래도 '영역 파괴'였다. 가전업체가 전기차를 들고 나오고, 자동차 업체는 로봇회사가 됐다. 문서작성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한글과컴퓨터는 메타버스 기업으로 거듭났다.

영역 파괴와 융합은 과거엔 비슷한 전례가 없어 그들이 가는 길이 곧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시작도 전에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규제에 막힌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본업을 이어가기 위해 한국에선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는 하소연도 흘러나왔다. 상황이 이런데 앞으로도 한국 기업들이 올해 CES에서 보여준 '퍼스트 무버'로서의 저력을 이어갈 수 있을까.

라스베이거스=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