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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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방병(에어컨병), 열사병, B형 간염, 후천성면역결핍증이 중대산업재해라고요?"

정부가 지난 9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안을 발표한 직후 경영계에서 나온 목소리다. 정부는 이른바 냉방병, 열사병, B형 간염 등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받는 중대산업재해 중 직업성 질병으로 분류했다. 작업 과정에서 발병하는 중대한 직업성 질병이라고 보기에는 인과관계가 명확치 않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이들 질병이 중대산재로 인정되면 한 사업장에서 1년 내 3명 이상의 근로자가 이 질병에 걸리는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는 처벌 받게 된다.

◆증세 심하지 않아도 중대재해로 간주될 우려

시행령 제정안의 직업성 질병 목록에 포함된 24개 질병을 둘러싸고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동물로부터 감염될 수 있는 브루셀라증, 여름 감기로 착각하기 쉬운 레지오넬라증이 대표적이다.

두 질병은 증세가 심하지 않고 적절히 치료 받을 경우 빠른 시간 내에 호전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연구 강북삼성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에어컨병으로 불리는 레지오넬라증은 특수한 직업환경에서 노출되는 병이라 보기 어렵다"며 "브루셀라증, 레지오넬라증은 한국에서 발병 사례가 매우 드물고, 걸린다 해도 항생제로 쉽게 치료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목록에 포함된 열사병도 군대나 공사현장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데, 사업장에서 발병 시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정부가 비교적 가벼운 질병까지 중대산업재해 대상으로 분류하면서 중대재해법이 자칫 처벌만능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시행령 제정안 발표 직후 "중증도(부상자의 6개월 이상 치료)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중대재해로 볼 수 없는 경미한 질병까지 중대산업재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지적한 대목이다.

정부가 산업재해로 분류한 질병 중 직업연관성 여부가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다. B형 간염과 C형 간염, 매독,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등이다. 간염의 경우 비교적 흔한 질병이라는 점에서, 매독과 후천성면역결핍증은 직업성 질병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질병은 '보건의료 종사자에게 발생한 경우'에만 한정된다는 설명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병원에서 흔히 발생하는 주사침 사고 등으로 인해 의사나 간호사 등이 감염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며 "일상 생활에서 발생한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채용 줄이고 기계화 가속"

시행령 제정안에 따르면 중대재해 직업성 질병의 절반 이상은 일산화탄소, 이산화질소, 납, 벤젠, 톨루엔 등 공업용 화학 물질과 관련한 '급성 중독'이다. 총 24개 질병 중 13개다.

노동계에서 직업성 질병 범위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뇌심혈관계, 직업성 암은 제외됐다. 발병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잠복기간이 있는 질병의 경우, 현재 사업주의 관리 잘못으로 병이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 외에 급성 호흡기 질환인 반응성 기도과민 증후군이나 급성 독성 간염도 포함됐다. 물리적인 이유로 발생하거나 사고성 질환으로 볼 수 있는 잠수병, 압착증, 산소중독, 산소결핍증, 급성 방사선증도 포함됐다. 바이러스성 질환인 탄저와 단독도 직업성 질병으로 들어갔다.

직업성 질병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에 대해 정부는 기우라는 입장이다. 김규석 고용부 산재예방감독정책관은 "(질병과 업무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고, 사업주가 질병을 예방하는 게 가능한 경우여야 한다"며 처벌대상 질병 선정 기준을 밝혔다. 사업주의 잘못을 입증할 수 있어야 처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한 대기업 안전관리 담당자는 "시행령이 이대로 확정된다면 기업들은 안전보건에 장기적 투자계획을 마련하기보다는 기계화를 통해 리스크를 회피하려고 할 것"이라며 "중대재해법이 인력감축, 채용축소라는 뜻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올수도 있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