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사업계획을 수립했거나 막바지 조율 단계에 접어든 상당수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배터리, 반도체, 비대면 플랫폼 등 비교적 전망이 뚜렷한 업종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들의 상황은 짙은 안갯속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최근 조사에서 국내 기업의 92%가 내년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거나 긴축경영을 하겠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투자 계획 수립을 위해 고려해야할 내년 경제 회복 변수를 한경 CFO Insight가 정리해봤다. 증권·투자은행(IB)업계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뿐만 아니라 미·중 무역분쟁,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와 북한의 핵협상, 반세계화와 각 국의 사회적 갈등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롤 감안해야한다고 조언한다.

◆ 백신보급으로 경기 살아나나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5개국에서 18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했다. 미국은 지난 11일 화이자 백신을 긴급 승인해 14일부터 접종을 시작, 21만1086명이 백신을 맞았다. 중국에서도 19일 기준 100만명 가량이 백신을 접종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달 세번째 코로나19 백신이 나온다는 소식도 나왔다. 미 보건부는 존슨앤존슨 계열사 얀센이 백신 3상 임상실험을 마치고 2021년 1월 긴급사용 승인을 요청할 것으로 예상했다. 브렛 지어와 미 보건부 차관보는 "내년 6월까지 미국에서 백신 접종을 희망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기회를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경 CFO Insight] "내년 투자계획 변수 너무 많다"
백신 보급이 시작되면서 희망적인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아시아와 서유럽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5%대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금융회사들은 증시 주가지수가 대폭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JP모간은 현재 3680포인트 가량인 미국 S&P500 지수가 내년 4400포인트까지, 골드만삭스는 4300포인트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 의회가 8920억달러(약 987조2000억원) 규모 코로나19 부양책 패키지를 통과시키면서 이 같은 전망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이 살아나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다는 전망도 나왔다. 제프리 커리 골드만삭스 책임이코노미스트는 현재 배럴당 50달러 수준인 브렌트유 가격이 내년 평균 65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 경기 낙관하지 못하는 기업들

다만 백신 보급속도가 예상에 못미치고 경기 부진이 길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 씨티그룹은 백신이 ‘집단면역’으로 이어져 충분한 인구가 코로나19에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은 내년 4분기에나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씨티그룹은 백신이 내년 글로벌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0.7%포인트 올리는 데 그칠 것으로 추정했다. 최근 영국에서 전염성이 강력한 변종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견되면서 유럽 각국이 영국발 항공편 운항을 중단하는 등 이동 제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백신이 빠르게 보급되는 미국에서도 아마존과 같은 곳은 사상 최대 투자를 계획한 반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석유기업 셰브론은 내년 설비투자액을 올해보다 26%가량 적은 140억달러 수준으로 줄였다. 유가 회복이 더딜 것으로 보고 2025년까지 설비 투자액을 연간 160억달러 이하로 유지할 방침이다. 윈(Wynn) 리조트도 라스베이거스 리조트와 카지노 객실 리모델링 계획을 전면 유보했다.

◆미중 분쟁, 제2의 사드 사태 우려

지정학적 위험도 기업들이 내년 투자 결정을 할 때 고려해야할 변수의 하나로 꼽힌다. 지정학적 위험은 직접적인 군사 분쟁 뿐만 아니라 국가간 또는 국가 연합 간 갈등을 비롯해 강대국 선거와 같은 정치적 이슈까지 포함한다. 삼성증권은 최근 발간한 지정학분석 보고서를 통해 ①미·중 갈등, ②북·미 비핵화 협상 ③국가적·사회적 갈등 심화 등을 내년 3대 지정학적 위험으로 들었다.

코로나19 사태로 바이러스 발원지인 중국에 비해 미국의 타격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나타나 미국인들의 부정적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은 코로나19 대유행을 패권 위협으로 정의하고, 기존 대(對)중국 압박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고서는 예상했다. 가장 큰 우려는 미·중 갈등의 진영화 가능성이다.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중국을 압박하는 새로운 국제 체제(쿼드 플러스 등) 동참을 요구하고 한국이 이에 응한다면 과거 중국의 사드 보복사태와 같은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경 CFO Insight] "내년 투자계획 변수 너무 많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도 변수로 지목된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원칙은 ‘제재와 대화의 동시 추진’이다. 다만 임기 초반엔 대북 제재를 지속하며 북한과의 협상은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북한이 관심을 끌기 위해 무력 도발을 감행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보고서는 "북한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섰다"며 "장기간 제재로 경제난이 심화된 가운데 코로나19가 결정타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경 CFO Insight] "내년 투자계획 변수 너무 많다"
사회적 갈등 심화로 인한 글로벌 공급체인 변동도 우려된다. 미국과 유럽에선 반세계화를 지지하는 정치세력 정당의 힘이 커지고 있다. 보고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과거 1차 세계대전 직후와 마찬가지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다국적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며 "최근엔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 확산되면서 국제적 분업이 더욱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 내부에선 지난 수 십년 간 소득과 자산이 극단적으로 높아진 최상위 1%를 보는 중산층의 불만이 터져나올 수 있다. 보고서는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중산층 이하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정치권이 반응하겠지만 입장차이를 조율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