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퀄컴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2016년 공정거래위원회의 퀄컴 조사 때 삼성전자는 대놓고 공정위 편을 들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이어진 특허 남용 관련 소송에선 의견서를 통해 ‘날 선 비판’을 주고받으며 아픈 곳을 찌르기도 했다.

이런 두 회사 관계가 최근 달라졌다. 공장이 없는 퀄컴은 반도체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기고, 삼성전자는 퀄컴 통신칩을 자사 칩 대신 주력 스마트폰에 넣고 있다. 1990년대 초반 ‘2세대 이동통신(CDMA) 기술 협력’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신(新)밀월’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실리’를 위해 과거의 앙금을 털고 협력 관계로 돌아섰다는 평가다.
치고받다가 '주고받기'로…삼성·퀄컴, 30년 만에 '5G칩 로맨스'
주력 제품 주고받는 삼성·퀄컴

2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퀄컴은 5세대(5G) 이동통신용 모뎀칩 ‘X60’ 생산 물량을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와 대만 TSMC에 나눠 맡겼다. X60은 내년부터 본격 공급될 퀄컴의 프리미엄 모뎀칩이다. 퀄컴이 주력 제품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긴 것에 대해 ‘의외’란 평가가 나온다. 퀄컴이 지난해 삼성전자에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 765’ 생산을 위탁했지만 프리미엄 제품은 아니었다.

삼성전자도 퀄컴 제품 채택에 한창이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20 국내 출시 모델에 퀄컴의 5G 통합칩 스냅드래곤 865를 채택했다. 삼성전자가 프리미엄 스마트폰 북미·중국 출시 모델에 퀄컴 칩을 쓴 적은 많지만, 한국 판매 모델에 자사 칩인 ‘엑시노스’를 뺀 건 이례적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스냅드래곤 865 한국 모델 채택 소식에) 퀄컴 본사 임직원들도 깜짝 놀랐다”고 설명했다.
치고받다가 '주고받기'로…삼성·퀄컴, 30년 만에 '5G칩 로맨스'
삼성 지렛대 삼아 TSMC와 가격 협상

두 회사가 ‘실리’를 택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인 퀄컴은 대다수 생산 물량을 세계 1위 파운드리업체인 TSMC에 맡겼다. 2~3년 전부터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극자외선(EUV) 기술력을 앞세워 치고 올라오자 일정 물량을 삼성에 주고 있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최근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자사 물량 외에 퀄컴, 엔비디아, IBM, 바이두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며 전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산업계 관계자는 “퀄컴은 삼성전자를 통해 TSMC에 대한 가격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에 안 맡길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로서도 ‘퀄컴 칩’은 나쁜 카드가 아니다.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파운드리 물량 수주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어서다. 벌써부터 업계에선 퀄컴이 차기 5G 통신칩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길 것이란 얘기가 돌고 있다.

경쟁과 협력 반복할 전망

업계에서는 삼성과 퀄컴의 밀월 관계가 지속될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2018년 1월 두 회사가 ‘글로벌 특허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 확대에 합의하며 갈등의 불씨를 껐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판매 세계 1위 삼성전자가 모바일 통신칩을 주력 제품으로 하는 퀄컴의 주요 고객인 점도 ‘핑크빛 무드’가 지속될 것이란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2019회계연도(2018년 10월~2019년 9월) 퀄컴 전체 매출 중 한국 비중은 9.9%다. 중국, 아일랜드, 미국에 이어 네 번째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베트남, 인도 등지에서 대다수 스마트폰을 생산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의 실제 비중은 15% 이상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가 2010년부터 자체 모바일 통신칩 엑시노스 개발·판매에 공들이고 있는 만큼 결국은 퀄컴과 진검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퀄컴도 사업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를 ‘반도체업계의 주요 경쟁 업체’로 꼽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초반 CDMA를 함께 키우며 협력한 이후 두 회사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해왔다”며 “지금은 서로 도우며 실리를 챙기고 있지만 향후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정립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