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다시 통화전쟁이 벌어질 조짐이다. 미국,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경기 부양을 위해 대거 ‘돈풀기’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나타났던 ‘글로벌 환율전쟁’이 10년 만에 재연되는 모습이다.

美·EU·中·日 또 '돈풀기'…환율전쟁 불붙는다
이번 통화전쟁의 방아쇠는 유로존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이 가장 먼저 당길 전망이다. ECB는 12일 통화정책회의를 열어 현재 제로(0)인 기준금리를 연 -0.1%로 낮출 예정이다. 1998년 ECB가 출범한 이후 첫 마이너스 기준금리다. ECB는 이와 함께 지난해 말 중단한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재개할 방침이다. 금리를 내리는 것 외에 시중에 돈을 직접 풀겠다는 얘기다. 차기 ECB 총재로 내정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완화적 통화정책 지지를 이미 선언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17~18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할 예정이다. 시장에선 현재 연 2.00~2.25%인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준금리를 1%포인트 내려야 하는데 Fed가 소극적이어서 외국과의 환율 경쟁에서 미국이 불리하다”고 Fed를 압박하고 있다.

시장에선 굳이 트럼프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Fed가 내년 말까지 금리를 1%포인트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회장은 “시장금리가 제로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행(BOJ)과 중국 인민은행도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더 풀겠다는 방침을 내비쳤다.

ECB, 첫 '마이너스 금리' 예고…Fed는 내년 말까지 1%P 내릴 수도
유로존 12일, 美 18일 금리인하…中, 지준율 더 낮추기로


21세기 이후 2차 글로벌 환율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1차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인 2009~2011년이었다. 미국,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위기 극복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다. 돈을 더 풀수록 금리가 떨어지고 통화가치가 낮아져 교역에서 유리한 환경이 마련됐다. 상대국 이익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국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정책’이 만연했다. 이번에도 경기부양을 위한 경쟁적 통화 완화 움직임이 같은 양상으로 흐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美·EU·中·日 또 '돈풀기'…환율전쟁 불붙는다
이달 EU·미국 금리 인하

가장 먼저 포문을 여는 곳은 유로존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12일 현재 ‘제로(0)’인 기준금리를 0.1%포인트 내릴 예정이다. 기준금리가 처음으로 연 -0.1%가 될 전망이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이 지난 2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데 이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악재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지난해 말 중단한 채권 매입을 비롯한 양적완화 정책까지 재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럽에 비해 경제 상황이 한결 나은 미국도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여파로 지난 7월에 이어 다음주 기준금리 추가 인하에 나설 예정이다. 시장에선 미 중앙은행(Fed)이 오는 17~18일 현행 연 2.00~2.25%인 기준금리를 연 1.75~2.00%로 인하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Fed에 1%포인트를 내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유로존이나 일본에 비해 금리가 높아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월가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아니어도 경기침체로 인해 미국 기준금리가 내년 말까지 1%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도 6% 경제성장률 사수를 위해 추가로 돈을 풀어 경기 둔화에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최근 내린 지급준비율을 더 내리고,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대출우대금리(LPR)를 인하할 예정이다. 일본도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와 엔고(高) 위협이 동시에 찾아오자 추가 양적완화 정책을 꺼낼 채비를 갖추고 있다. 2016년부터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은행(BOJ)은 달러화 약세에 따른 엔고 강세가 계속되면 기준금리를 더 낮추거나 국채 매입을 확대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환율전쟁은 이길 수 없는 게임”

주요국은 자국 통화가치 절하를 통한 경기부양 의도를 부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놓고 지난 6월 드라기 총재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드라기 총재가 양적완화를 시사하자 “환율조작”이라고 비난했다. 드라기 총재는 “아니다”고 맞받아쳤다.

미·중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지난달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결정하자 중국 인민은행은 강력 반발했다. 지난 6월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도 회원국들은 경쟁적 통화가치 절하를 자제하겠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그러나 미국 경제매체 CNBC방송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주요국 중앙은행이 환율전쟁에 물밑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 세계 각국에 자국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환율전쟁은 한층 격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환율전쟁은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인데, 각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글로벌 경제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중앙은행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환율전쟁에 잇달아 개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율전쟁은 미·중이 대표적이다.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은 최근 11년 만에 7위안을 돌파(위안화 가치는 하락)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연말엔 달러당 7.3위안으로 환율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로화 가치도 미·중 무역분쟁 및 독일 경기 부진 소식 이후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런던=강경민/뉴욕=김현석 특파원/베이징=강동균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