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농민 복지를 증진시키겠다며 설립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대기업에 돈을 걷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국전력 등 공기업이 50억원씩을 냈지만 모금 목표액의 16%밖에 채우지 못하자 민간 기업에도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정권에서 이뤄진 대기업의 기부 활동을 ‘적폐’로 규정한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대기업에 손을 벌리는 것을 두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0대 그룹 간담회 추진

농어촌상생기금까지… "대기업이 더 내라"는 정부
1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모금을 위해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을 통해 5대 그룹 또는 10대 그룹과의 간담회를 추진 중이다. 협력재단이 지난해 총 106회의 기업설명회를 열었는데도 돈이 모이지 않고 있다고 판단해 내린 조치다. 기부금품법 5조에 따라 정부가 직접 기부금을 모집할 수 없기 때문에 농식품부는 협력재단을 내세워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은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당시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여·야·정이 농수산물 생산·유통 사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 설정한 기금이다. 작년 3월 출범했으며 매년 1000억원씩 10년간 총 1조원을 모으는 게 정부 목표다.

하지만 지난해 모금액은 309억6450만원에 그쳤고 올해 모금액은 15억7773만원이다. 정부가 올해 말까지 2000억원을 모으겠다고 약속했던 점을 감안하면 목표액의 16%밖에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모금액의 98.9%는 공기업에서 걷은 것이다. 지난해 가장 많은 돈을 낸 곳은 한국서부발전(53억원) 한국남동발전(51억원) 한전(50억원) 한국남부발전(50억원) 등 에너지 공기업이었고 대부분 기부는 12월에 이뤄졌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연말까지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정부가 공기업에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민간 대기업 중에는 현대자동차가 2억원을 낸 게 유일하다. 협력재단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로 대기업이 기부와 관련한 내부 규정을 강화해 모금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적폐로 몰 땐 언제고…”

농식품부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내놓는 민간기업에 동반성장지수 가점을 부여하는 방안을 중소벤처기업부와 협의하고 있다. 동반성장지수 ‘최우수’ 또는 ‘우수’를 받은 기업은 공정거래위원회 직권조사를 1~2년 면제받고 조달청 입찰 참여 시 가점을 받는다.

정부가 인센티브를 내놨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기부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때 정부가 요구해 미르재단에 돈을 낸 기업 총수들이 옥살이까지 치르지 않았느냐”며 “올해 기부금을 냈다가 정권이 바뀌면 ‘대가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또다시 문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민간기업 관계자는 “전 정권에서 이뤄진 대기업의 기부를 ‘순수성이 의심된다’며 적폐로 치부하던 현 정부도 비슷한 일을 계속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협력재단을 통해 대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위한 기부금을 요구해 논란이 됐다. 기업들이 2013년부터 오는 7월까지 진행되는 ‘산업혁신운동’ 1단계 사업에 총 2277억원을 냈는데, 산업부는 8월부터 시작하는 2단계 사업에선 출연액을 20% 늘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훈/임도원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