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씨 비자금사건이 "전직대통령의 구속"으로 큰 고비를 넘기면서
이제는 경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의 상태를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이미 "불안" 징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손을 보야야 한다는 게 경제계와 학계의
이구동성이다.

실제로 최근 민간연구소와 관변 연구기관들이 내놓는 전망치들은 비자금
파문이 이미 실물과 금융등의 각분야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대표적인 관변연구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는 최근 재정경제원에 제시한
경제전망에서 올4.4분기의 실질경제성장율이 당초 예상한 7.9%보다 다소
낮은 7.8%에 머물 것이라고 수정했다.

비자금사건 때문이라고 못을 박지는 않았지만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기업의 투자증가추세가 현저히 위축되고 수출과 내수소비가 둔화되는게 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KDI는 내년 경제성장율도 당초엔 7.5~7.8%로 예상했었으나 가장 낮은
수치인 7.5%로 전망치를 낮추었다.

경기하강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질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특히 KIET(산업연구원)는 17일 작성한 "비자금파문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번 사건이 기업총수들의 사법처리로 확대되고 정치권
의 동요가 장기화될 경우 국내경제가 타격을 받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KIET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은 국내기업의 형태로 인해 기업
총수들이 사법처리 될 경우 생산과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고 하청기업의
생산활동 위축등으로 이어지면서 경제전반의 상태가 악화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민간연구소들도 7.0~7.6%로 보았던 내년도 경제성장율을 7%대 초반으로
낮추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투자도 그렇지만 수출과 소비둔화로 전반적인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라는게
이들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이같은 전망들은 대체로 "비자금사건의 파문이 확산될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요즘 경제지표들의 동향을 보면 이미 태풍의 영향권안에 들어가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자금사건이 시작된지 1개월 사이에 주가지수는 50포인트 가량 빠졌다.

국내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면서 외국투자가들로 속속 빠져나가고
있다.

국내기계수주를 비롯한 투자지표들은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비자금사건의 탓만이 아니긴 하지만 생산과 출하증가율은 1년만에 최저치인
반면 재고증가율은 2년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수출의 선행지표인 LC내도액 증가율이 감소세를 나타내는 이변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국민과 근로자들은 "수천억"이라는 비자금의 규모로 좌절감과 허탈을
느끼고 있다.

애써 일할 의욕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근로의욕이 꺾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인들이 건네준 수백억원도 결국엔 소비자들이 낸 돈이라는 불쾌감
때문에 기업과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전례없이 나빠져 있다.

해외에서 한국관련 금융상품의 값이 떨어진다든지 한국기업과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추락했다는 등의 보도 또한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여기에다 우리경제가 직면해 있는 상황은 온통 악재투성이다.

경제성장은 내리막으로 예정돼 있다.

노총과 대립하는 민노총이 출범해 가뜩이나 하강이 예상돼 있는 상황에서
노사관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경제가 오그라들 때마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건설업계는 비리의 온상
으로 지목돼 대대적인 부조리방지책의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다.

게다가 총선이 예정돼 있다.

선거라는 게 의례이 시끄러울수 밖에 없지만 내년 선거는 시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속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여파가 저성장과 맞물리고 총선으로 물가까지 자극받는다면
내년의 상황은 한마디로 "스케그플레이션"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게
경제계의 우려다.

KIET는 이번 보고서에서 "비자금파문이 장기적으로 우리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이후 예상되는 수축기에 국내경기가
급격히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도금융권에서의 자금유출 방지와 건설업계및 중소기업의 자금사정 악화를
미리부터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산업활동과 관련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이 정경유착의 근인인 만큼
행정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비자금조성과 탈세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기업경영을 투명화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이유로 경제가 볼모잡혀선 안된다는게
경제계의 중론이다.

<정만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