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10월 프라이스클럽이 처음 문을 열었을때 라면업계 선두업체인
농심이 신라면 육개장사발면등 자사제품을 공급했다가 10여일만에 철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프라이스클럽이 대리점공급가격보다 낮은 수준을 요구하자 농심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프라이스클럽에서 판매되는 농심제품의 매출액은 월 2천만원정도입니다.
서울의 웬만한 대리점 판매액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한 프라이스클럽을 위해
가격체계를 무너뜨릴수는 없었지요"(농심 조병윤영업직판과장)

이같은 사례는 할인점이 등장하기 전에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메이커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가격결정권에 대해 유통업체가 반기를 든
사건이다.

"대리점가격보다 싸게 물건을 주지않으면 제품을 팔지않겠다"는 유통업체
가 생겨났다는 사실 자체가 제조업체들에겐 하나의 충격이었다.

프라이스클럽은 농심과의 협상에서 결국 밀렸다.

농심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대리점가격에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가격결정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유통업체가 "제시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한 물건을 줄수 없다"는 제조업체의 배짱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유통업체에 대한 제조업체의 우위는 그다지 오래 지속될 것같지는
않다는게 유통업계관계자들의 얘기다.

실제로 올해들어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간 역학관계가 서서히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지난해까지 E마트 프라이스클럽등에 불과했던 가격할인점이 올들어
그랜드마트 킴스클럽등으로 점포가 늘어나고 있다.

제조업체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유통업체들이 늘어날수록 유통파워가
강해질수 밖에 없다.

동서식품의 요즘 고민은 가격할인점의 잇따른 출현이 제조업체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할인점에 상품을 공급하지 않고 있는 이회사가 판매전략의 수정을 검토
하고 있는 것이다.

이회사는 할인점이 증가하면서 경쟁사인 네슬레의 할인점판매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자 할인점에 제품을 공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제품포장이나 크기등을 할인점에 맞게 바꾼 제품을 개발하는 쪽으로
검토중입니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할인점을 무시할수만은 없지요. 할인점이
보편화될지는 확실치않지만 어쨋든 유통과정 재편에 맞는 영업정책을 마련
해야 하겠지요"(동서식품 김용언전무)

할인점에 대한 대응방법은 물론 업체마다 다르다.

"묶음" "박스단위" 또는 "대용량"으로 판매하는 업체가 있는가 하면
무인상품(상표없는 제품)을 개발하는 곳도 있다.

제일제당은 2kg짜리 "다시다"와 7kg짜리 카톤팩형태의 "비트"등 기존제품
과 차별화한 대용량의 제품들을 할인점에 공급하고 있다.

미원도 최대용량이 1kg이였던 "맛소금"과 "감치미"를 2kg과 1.5kg으로
각각 늘렸으며 마요네즈와 케찹의 경우 2개씩 포장해 진열하고 있다.

LG화학은 죽염치약등을 박스단위로 판매하고 있으며 대용량의 "한스푼"과
"자연퐁"을 할인점용으로 내놓았다.

동양맥주 조선맥주 진로등 주류업체들과 롯데칠성음료 비락등 음료업체들,
삼양식품등 라면업체들도 박스단위로 판매하고 있다.

풀무원은 E마트 창동점과 일산점에 상표없이 포장을 단순화시킨 3.2kg짜리
판두부와 6백g짜리 면류및 묵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들 제조업체는 모두 대리점체제 유지를 통해 가격결정권을 손에 쥐는
한편 할인점을 통한 판매도 늘려가겠다는게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같은 제조업체들의 영업전략이 언제까지 계속될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 미국등에서 제조업체들의 판매와 가격에 대한 결정권이 유통업체로
넘어가고 있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제조업체의 힘이 유통업체로 급속히
이전될 가능성이 크다.

"가격파괴는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간 싸움의 역사"라는 선진국경험이 최근
업계에 자주 회자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만큼 제조업체들이 할인점의 출현에 대해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