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화'는 예술 통제에 맞서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안리 살라)
"여성들이 역동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꼈다."(미에 키에르고르)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역설적으로 예술 세계를 위한 토양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안리 살라와 미에 키에르고르도 마찬가지다. 겹겹이 쌓은 잔잔한 프레스코화로, 거침없는 붓질로 완성된 동적인 회화로. 태어난 나라도 화풍도 딴판인 두 작가를 묶은 키워드는 온갖 제약과 통제에 대한 '해방'이다.

독재 사회에서 해방감 준 프레스코화

알바니아는 요동치던 20세기 유럽 정세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 자리한 탓에 숱한 정권 교체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유럽의 북한'이라 불릴 정도로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도 통제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 열리고 있는 안리 살라 개인전 전시 전경 /에스더쉬퍼 제공
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 열리고 있는 안리 살라 개인전 전시 전경 /에스더쉬퍼 제공
안리 살라한테 프레스코화는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 탈출구였다. 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 5월 11일까지 열리는 살라의 개인전 'Noli Me Tangere(라틴어:노리 메 탕게레·나를 만지지 말라)'는 그의 최근 프레스코 연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기원한 프레스코화는 덜 마른 회반죽 바탕 위에 안료를 겹겹이 채색하는 기법이다.

살라는 프레스코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프레스코화는 안료가 다 마르기 전까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주제 선정부터 드로잉, 채색까지 엄격히 통제하는 사회에서 내게 자유와 디톡스를 느끼게 해줬다"고 말했다.

▶▶▶(관련 아티스트DB) 안리 살라, 예술에 대한 통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안리 살라 프로필 이미지 /에스더쉬퍼 제공
안리 살라 프로필 이미지 /에스더쉬퍼 제공
그동안 살라는 회화보단 '영화적 설치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무채색 도시였던 고향이 알록달록한 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을 촬영한 '색칠해 주세요'(2003), 사라예보 내전의 역사적 기록을 편집한 '붉은색 없는 1395일'(2011) 등이 대표작이다. 그의 작업은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갤러리 등 유명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영상 작업의 특성을 이번엔 평면 회화 작업을 통해 구현했다. 곳곳에 대리석을 붙인 프레스코화 화면에 비행기에서 바라본 풍경, 종교화의 한 장면 등을 담아냈다. 대리석 특유의 색상과 줄무늬가 형성되기까지 길게는 수억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과정에 담긴 지질(地質)적 시간과 역사를 층층이 엮어낸 그의 작품들은 오래된 화석 같은 인상을 준다.
안리 살라 'Noli Me Tangere Inversa (Fragment 1)' ©Andrea Rossetti /에스더쉬퍼 제공
안리 살라 'Noli Me Tangere Inversa (Fragment 1)' ©Andrea Rossetti /에스더쉬퍼 제공
전시장 2층에 걸린 'Noli Me Tangere Inversa'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프라 안젤리코(1387~1455)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를 차용한 작품이다. 부활한 예수를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기쁜 마음에 끌어안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안리 살라 'Surface to Air XIX' ©Andrea Rossetti /에스더쉬퍼 제공
안리 살라 'Surface to Air XIX' ©Andrea Rossetti /에스더쉬퍼 제공
'Surface to Air(지상에서 하늘로)' 연작은 비행기에서 직접 촬영한 하늘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리석을 활용해 다른 유기질 없이 꽉 찬 부드러운 구름을 표현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대리석 조각이 일순간 존재했다 사라지는 구름과 대조를 이룬다. 살라는 "자연의 흐름 속에 그림은 변화하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임을 알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포츠에서 본 여성 해방의 서사

탁 트인 전시 공간, 가로세로 2m가 넘는 널찍한 화면에 여성들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평범한 스포츠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특이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화면 속 여성들은 네트 위에 앉아있거나 요가 자세를 취하는 등 본 경기에는 관심이 없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파운드리 서울 개인전 'Gamechanger' 전시 전경 /파운드리 서울 제공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파운드리 서울 개인전 'Gamechanger' 전시 전경 /파운드리 서울 제공
정해진 규칙의 틀을 깨겠다는 의미의 전시 제목은 '게임체인저(Gamechanger)'. 덴마크 작가 미에 키에르고르는 이처럼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한다. 다부진 포부를 안고 처음 방한한 그의 개인전이 서울 한남동 파운드리에서 5월 11일까지 열린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키에르고르는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다. 최근 베를린, 런던을 넘어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를 오가며 개인전을 열고 있다. 코펜하겐과 에딘버러, 런던 등에서 여러 신인상을 거머쥔 떠오르는 작가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작가 프로필 이미지 /파운드리 서울 제공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작가 프로필 이미지 /파운드리 서울 제공
조선공으로 일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는 배(船)가 자주 등장한다. 'Playing Ship'은 뗏목에 올라탄 여성 다섯명이 주인공이다. 표류하는 건지, 목적지인 섬에 도달한 건지 함께 돛에 올라탄 이들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고 있다.

'Mother and child-new territories'는 거침없이 배를 몰고 가는 여성과 이런 어머니를 믿고 의지하는 어린 아들이 등장한다. 작가와 어린 아들의 삶이 함축된 작품이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Mother and Child-New Territories'(2023) /파운드리 서울 제공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Mother and Child-New Territories'(2023) /파운드리 서울 제공
작품 곳곳에는 유머러스한 포인트가 돋보인다. 빛의 각도에서 어긋나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자, 허들을 뛰어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성 등이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환기한다. 키에르고르는 "페미니즘이 주요 관심사이지만, 이런 주제를 어렵거나 딱딱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표정이 극도로 단순화됐다는 점도 주요 특징 중 하나다. 대부분 무표정하거나 이목구비가 어긋난 얼굴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예쁜' 얼굴과 거리가 멀다. 키에르고르는 "예쁘게 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원래 알고 있던 이미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여성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녀평등의식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인 덴마크에서마저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낍니다. 저의 작품이 페미니즘만을 대변하기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한 합창단의 일원으로 여겨졌으면 합니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Balancing on the Net'(2023) /파운드리 서울 제공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의 'Balancing on the Net'(2023) /파운드리 서울 제공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