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한물간 일본 만화가들에게서 발견한 것
담당한 만화 잡지가 망했다. 쓰디쓴 폐간의 맛.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사라진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남아서 다른 일을 하거나, 조직을 떠나거나. 일본 대형 출판사의 중년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 가즈오는 후자를 택했다. 그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회사와 작가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내몰았으리라.

30년 동안 묶여 있던 만화라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집에 있던 만화책을 모두 처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마음을 돌린 시오자와는 다시 한번 만화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고는 만화가들을 한 명씩 만나 원고를 청탁한다. 한때 눈부시게 화려했던 일본 만화산업을 이끈 창작자들이다.

그런데 시오자와가 찾아간 만화가들의 모습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미야자키 초사쿠는 왕년의 히트 만화가이지만, 그에게 만화는 생활비를 버는 수단 중 하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시오자와조차 “빈 껍데기만 남아 있다”고 실망을 드러낼 정도다. 만화계를 은퇴하고 아파트 관리원으로 일하는 아라시마야 신에게는 ‘이제 그만 찾아와달라’며 거절당한다. 심지어 다른 출판사의 전담 만화가인 이다바시 마치코를 찾아갔다가 상도덕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반짝이던 시절을 뒤로하고 속 빈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 독자의 비위를 맞추며 겨우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만화가, 가족을 위해 만화를 버렸지만 결국 가족과 불화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남겨진 만화가, 더 이상 만화가가 아닌 만화가…. 시오자와는 이들의 그림을 받아 무사히 만화책을 펴낼 수 있을까. 시오자와는 무엇을 위해 만화책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 아직 완결되지 않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다른 한 축은 젊은 만화인들의 이야기다. 개성 있는 만화로 주목받지만, 자신감과 불안 사이를 아슬아슬 오가는 만화가 아오키 슈, 아오키의 변덕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성공시키려는 담당 편집자 하야시 리리코, 미야자키의 어시스턴트로 맡은 일을 말끔히 해내지만 정작 자기 작품을 내지 못하는 구사카리까지. 눈앞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그들이지만 시오자와는 그마저도 부럽다. 좌절하고 또 기뻐하며 반짝이는 시절을 지나는 중이라는 걸 알기에.

<동경일일> 시리즈는 데뷔 36년을 맞은 ‘만화가들의 만화가’ 마쓰모토 다이요가 처음으로 작품에 담아낸 일본 만화계의 풍경이다. 유행하는 그림체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일가를 이뤘지만, 대중의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과 동료들에게 바치는 묵묵한 응원처럼 읽힌다.

시오자와가 전성기를 지난 만화가들을 모아 만화책 한 권을 내놓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그가 재기를 위해 만화책을 만들려는 것 같지는 않다. 시오자와는 그저 지금껏 해온 일,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것일 테다. 그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원하던 곳에 닿으리라는 기대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한물간 만화가들일지라도, 그들이 보낸 하루하루가 무의미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그림을 부탁하지 않았을까.

유키 구라모토 같은 고령의 연주자들이 지금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세상의 기대가 아닌,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한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전성기는 지났을지라도, 손때 묻은 가구에서 윤기가 나듯 충실한 하루하루가 쌓이면 오래도록 은은히 빛날 수 있음을 이 만화에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