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느끼는 그 수 많은 감정들에도 모양이 있을까. 스치듯 지나간 감정의 조각들이 결국 나라면, 그것은 대체 어디서 시작돼 지금의 모양에 이르렀을까.
주가희(KAI, JU· 47)는 그런 감정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작가다. 지난 6일부터 서울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엔 그가 지난 5개월을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작업한, 30여 점의 마음 조각들이 한 데 모였다. 마루아트센터는 그룹전을 주로 해온 KAI, JU 작가의 신작들로 기획 초대전을 열었다.
주가희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
주가희 첫 개인전
거친 표면 위에 자리 잡은, 반듯한 선들은 육각형을 이룬다. 그 육각형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교하게 긋고 지나간 선, 무심히 긁힌 흔적, 흩뿌려진 점들이 기하학적 모양으로 한 화면 속에 존재한다. 검정에서 출발한 도형들은 하도 벗겨져 흰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으로, 아직 짙은 회색으로, 먹색으로도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중첩되고, 연결되며 그렇게 화면 위를 가로지른다. 멀리서 보면 규칙적이고 매끈한 선들이, 가까이서 보면 흠집과 상처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깊은 마음 속에 들어온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주가희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
주가희 첫 개인전
보이지 않는 감정을 들여볼 수 있는 이 작업엔 여러 도구로 누르고 찍고 또 긁어내는, 여러 단계를 거친 판화 기법이 주로 쓰였다. 그 바탕은 작가가 홈메이드로 만든 5㎜두께의 두툼한 닥종이. 우둘투둘한 캔버스의 표면은 작가가 한지의 재료인 닥 섬유를 구입해 집 욕조에 물을 받아 일일이 풀어헤친 뒤 나무 틀에 올려 말리는 수십 번의 작업 끝에 완성됐다. 절반 이상의 종이는 버려진다. 살아남은 종이 위에 잉크를 찍어내고, 그 위를 깎아내는 음각 기법, 일부는 볼록하게 튀어나오게 하는 양각 기법이 쓰였다. 대표작은 가로 세로 2m가 넘는다. 80호의 캔버스 4개를 이어 만든 이 작품은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작업하는 결과물이라 믿기 힘들다.
주가희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
주가희 첫 개인전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종이들을 이어 붙이는 작업, 그 위에 형태를 찍어내고 바늘과 칼 등으로 긁어내는 에칭 기법을 주로 썼습니다."

흔한 판화 작업과 달리 그의 작품은 장르를 구분하기 어렵다. 색채와 질감 면에선 동양화 같기도, 그 구조와 화면 분할은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작업 같기도 해서다. 멀리서 보면 구상회화인데, 가까이 들여다 보면 추상의 그것 같다. 그는 전업 작가로는 이제 3년차. 서울예대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공연와 건축 사진을 주로 찍다 홀연히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늦깎이다.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상담 치료를 받던 중 심리학에 매료돼 유학을 떠났어요. 미술치료 수업에 특히 매료됐지요. 학교 공개 게시판에 주기적으로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올리고 반응을 얻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게, 작업의 계기가 됐습니다."
주가희 작가
주가희 작가
하나의 그림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댓글로 달리는 것을 본 그는 어릴 적 꾸준히 쓰던 그림일기가 생각났다. '나의 마음은 어디서부터 형성된 걸까'하는 본질적인 고민은 어린 시절로 그를 이끌었다. 엄마와 점으로 삼각형을 연결해가며 놀았던 '땅따먹기 놀이'가 생각났다.

"노트 구석구석에 언제 그린 지도 모를 낙서같은 그림들이 있었어요. 점을 찍고, 그 점을 선으로 연결하고, 선을 겹쳐 면으로 만들고. 그것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그린 것들이었죠."
주가희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
주가희 첫 개인전
주가희 첫 개인전 <From Scratch- 감정의 기하학>
주가희 첫 개인전
그는 점과 선과 면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점은 감정의 근원, 선은 감정의 흐름, 면은 감정의 집합으로 보았다. 이런 감정의 흔적과 복잡성을 연결하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그는 이전에도 그룹전에 여러 차례 참여했지만 주로 민화 전시가 대부분이었다. 작업의 기본 패턴은 지금과 비슷했지만, 내면에서 원하던 색채보다는 민화 특유의 색을 강조하는 작품이 많았다.

"저는 어떤 색도 튀어나올 수 없는, 검정이 오히려 가장 순수한 색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색도 입힐 수 있는 하양보다 본성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요."

그의 작품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상처 입고 긁힌 마음의 조각들이 마치 눈 결정체처럼 보인다. 물이 얼음이 될 때, 분자들이 결합해 육각 구조를 만들고 그것들이 서로 강력하게 끌어당겨 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나 조차도 어쩌지 못한 무수한 마음들이 결국 한 곳에 응집돼 한 사람을 이루는 것처럼.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것처럼. 전시는 오는 18일까지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