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41년(1765년) 윤이월 23일 밤,

영조가 직접 경희궁 흥화문 밖으로 나섰다. 궁궐 입직 당번이 만류했다. “깊은 밤중에 왕이 직접 궁궐 문을 나서는 것은 국체를 손상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영조는 그 자리에서 옥당관(玉堂官·입직 당번)의 벼슬을 박탈하고 흥화문으로 행차했다.

영화 ‘파묘’에 출연한 배우 유해진(왼쪽부터)·이도현·김고은·최민식. /쇼박스 제공
영화 ‘파묘’에 출연한 배우 유해진(왼쪽부터)·이도현·김고은·최민식. /쇼박스 제공
그곳에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심정최와 윤희복이라는 두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문의 명예를 건 소송전을 치열하게 진행해 오던 중이었다.

영조는 명망가 출신들이 지리한 소송을 계속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데 진노했다. 두 사람을 친히 심문하고는 형장(刑杖)을 가한 뒤 유배형을 명했다.

일흔살이 넘은 두사람은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을 갖고, 그중 윤희복은 며칠 뒤 사망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건 소송전을 불사한 이유는 조상의 묏자리 때문이었다.

이후 250년을 끈 묘지 소송,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산송(山訟·조상의 묘지를 둘러싼 소송)의 시작이었다.

조선 시대 묘지 소송사를 상세히 다룬 <조선의 묘지 소송-산송, 옛사람들의 시시비비>(김경숙)라는 책에 따르면 국왕까지 개입한 초대형 쟁송의 시작은 파평 윤씨의 '조상 찾기'에서 시작됐다.

고려시대 재상을 시낸 윤관의 후손들인 파평 윤씨들은 고려·조선 초에 사라진 윤관의 묘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조선 중기 이후 부계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고 사라진 원대 조상의 분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계 의식 강화되면서 수면 위로 나타났던 것이다.

파평 윤씨들은 윤관의 묘가 경기도 파주의 분수원에 있다는 옛 기록에 근거해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파편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잃어버렸던 윤관 장군의 묘지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기나긴 갈등의 시작이었다.

바로 윤관의 묘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청송 심씨 출신으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 바로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윤씨가에게서는 심씨가에 심지원 묘의 이장을 요구했지만 심씨가에서는 “100여년 이상 아무 문제 없이 수호해온 조상의 묘를 옮길 수 없다”고 맞섰다.

초기 소송은 분묘의 인근 고을인 고양, 파주, 교하에서 진행됐지만 골치 아픈 소송을 떠맡길 꺼린 세고을 수령이 차례로 소송인과 인척 관계라는 이유를 들어 소송을 경기도 관찰사로 떠넘겼다.

관찰사의 손에서도 해법을 찾지 못한 소송은 결국 조정으로 파급됐고 마침내 왕이 직접 나서 화해를 주선했다.

1764년 6월 14일 영조는 “윤관은 고려의 명재상이고 심지원은 우리 조선의 명재상이라 똑같이 치재한다”며 각자의 묘를 수호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두 가문은 “두 개의 묘를 모두 보호하라”는 왕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장기전을 벌였다. 양측 사람 간 패싸움도 벌어졌고, 양측이 모두 경쟁적으로 상언과 격쟁을 올려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결국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며 영조가 두 가문의 대표인 심정최와 윤희복을 유배 보냈지만 끝내 이 문제는 해결을 보지 못했다. 가문의 사회적 위상과 명예가 걸린 민감한 사항에 두가문 사람들은 총출동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두 가문의 대립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됐고 결국 21세기에 접어든 2010년 윤씨 측에서 이장 부지를 제공하고 심씨 측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250년 만에 극적으로 해결됐다고 한다.

묘지를 둘러싼 대립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고 한다. 조상의 묘를 둘러싸고 250년간이나 피를 튀긴 싸움을 이어갔다는 것은 후대인이 보기엔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 사회의 관념, 가치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일이고 사회경제적 변동, 신분 질서의 동요를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사회현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장례와 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하게 바뀌는 상황에서 묏자리·풍수지리를 주제로 한 영화 '파묘'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아마도 묏자리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가 성공하는 것도 한국에서 밖에 없을 듯싶다. 과거 한국 사회가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묏자리에 유독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