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바라 게이이치(桑原敬一)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생존자’다. 1945년 5월 4일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향하던 그는 엔진 고장으로 기체가 불시착하면서 ‘죽음의 비행’에서 살아 돌아왔다. 구와바라처럼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가미카제 생존자임을 공개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이가 살아남았다.제2차 세계대전 말기 격전지 오키나와로 가는 길목인 가고시마현 도카라열도에는 ‘불시착’한 비행기가 줄을 이었다. 특히 스와노세지마, 다이라지마, 나카노시마 세 섬에 중도 착륙이 집중됐다. 그중 나카노시마에만 1945년 4월 16일부터 5월 19일 사이 최소 8대의 가미카제 비행기가 ‘불시착’했고, 대부분 조종사가 제 발로 걸어서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가고시마현 지란 항공기지에서 이오지마로 향하던 전폭기 상당수는 이륙하자마자 몇 분 거리에 있는 미시마라는 작은 섬에 비상 착륙했다.가미카제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불시착>이란 책을 낸 히다카 고타로(日高恒太朗)에 따르면 세 번이나 불시착했다가 귀환한 한 특공대원은 끝까지 “고의로 불시착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기체에 결함이 있었다고만 주장했다. 일본 군부는 “(가미카제 조종사들이)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았다거나 기체가 고장 났다는 이유를 들지만 정말로 고장 난 것인지 고의로 착륙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못마땅해했다.후쿠오카에 있는 ‘무운을 떨친 군인의 숙사’란 뜻의 신부료(振武寮)라는 군 시설에 수용됐던 생환자 일부는 다시 비행기에 올라 목숨을 버렸지만, 많은 수가 정신교육을 받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군국주의의 강압 속에 군의 사기를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이 경영자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으로 꼽힌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리버럴 아트(liberal arts)’의 쓸모를 강조한 이후 성공한 기업인을 위한 단순한 장식품이나 지적 허영의 대상에서 벗어난 모습이다.는 흔히 문학, 역사, 철학을 통칭하는 인문학, 리버럴 아트를 몸에 배게 익히는 것이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훌륭한 경영자의 필수 덕목으로 우뚝 섰음을 선언하는 책이다. 저자는 경영 현장을 인문학 이상을 실현할 공간으로 보고 자유, 진리, 존재, 정의, 예술과 같은 키워드로 경영 난제를 풀어나가고자 한다.경영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사색과 성찰의 끈을 놓는 순간 사업은 방향을 잃고 성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책은 특히 기업 경영에 격변을 초래하고 있는 AI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천착한다. 그리고 AI의 산출물이 아무리 완성된 것으로 보여도 그 본질은 제조업의 원재료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또 경영자는 AI가 내놓은 산출물에 속지 않아야 하며 판단은 어디까지나 경영자의 몫이라고 단언한다.김동욱 기자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이 경영자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으로 꼽힌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리버럴 아트’(liberal arts)의 쓸모를 강조한 이후 성공한 기업인을 위한 단순한 장식품이나 지적 허영의 대상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여전히 인문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인과 경영자 사이에는 깊이 팬 해묵은 인식단절의 골이 여전하다. <AI 앞에선 경영자의 선택 리버럴 아트>는 흔히 문학, 역사, 철학을 통칭하는 인문학, 리버럴 아트를 몸에 배게 익히는 것이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훌륭한 경영자의 필수 덕목으로 우뚝 섰음을 선언하는 책이다. 그동안 지식인(인문학)과 경영자(실업)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때로는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때로는 멸시하고 폄하해 왔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경영 현장을 인문학 이상을 실현할 공간으로 보고 자유, 진리, 존재, 정의, 예술과 같은 키워드로 경영 난제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인문학적 지식과 시각은 쓸모없는 장식품이 아니다. 비즈니스맨은 바쁘다는 뜻의 영어 단어 ‘비지(busy)’에서 파생된 명칭이지만 경영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사색
19세기 말 미국 뉴욕 거리는 말똥 천지였다. 곳곳에 높이가 2m에 달하는 말똥 더미가 쌓여 있었다. 말의 분뇨에서 나는 악취와 셀 수 없이 달려드는 파리떼는 도시의 상징이었다. 1867년 뉴욕에선 1주일에 평균 4명의 보행자가 말에 치여 사망했다. 뉴욕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1870년 보스턴은 인구 25만 명에 말이 5만 마리나 됐다. 시카고에선 매년 말의 사체만 7000마리씩 나왔다.말은 교통수단 이상이었다. 1872년 말들이 집단으로 감기에 걸리면서 미국 동북부 주요 도시는 말 그대로 마비됐다. 대중교통 역할을 담당하던 마차업체는 운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도시 내 운송을 전담하던 말이 사라지면서 기차역엔 화물이 쌓였고, 도시민의 생활에 필요한 우유와 얼음, 야채, 맥주 등은 동이 났다. 공장들이 멈춰 섰고 소방업무와 쓰레기 처리 같은 도시의 행정업무도 발이 묶였다. 교통과 물류 유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위상은 수백 년간 절대적이었다.하지만 자동차가 등장하자 말은 순식간에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원하는 때 움직일 수 있고, 사료를 먹지도 않고 배설물도 없는 자동차는 막강 그 자체였다. 1900년 미국에는 자동차 등록 대수가 8000대에 불과했지만 불과 10년 만에 46만8000대로 치솟았다. 다시 10년이 지난 1920년에는 자동차 수가 900만 대로 폭증했고, 1929년에는 2300만 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경제사가 로버트 고든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미국을 비가역적으로 바꾼 변화’라고 평가했던 자동차의 등장과 확산 과정을 다시 보는 것과 같은 큰 변화가 눈앞에 일렁이고 있다.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든 인공지능(AI)이 100년 전 자동차가 전했을 법한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아직도 많은 사람은 AI가
석분·석건·석경 부자를 비롯해 위관, 직불의, 주인, 장숙은 중국 한(漢)나라 때 승상직 등 각종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음에도 사마천은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이들을 한데 묶어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을 썼다. 출신과 배경, 족적이 제각각인 고만고만한 인사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이들은 개인적으로는 신중하고 예의가 발랐으며 업무에도 충실했다. 하지만 “어떤 원대한 계획도 없었고 백성을 위한 발언도 하지 못했다”거나 “관리가 돼 자리가 승상에 이르도록 가치 있는 것을 제안한 적이 없었다”는 사관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성현의 재능을 지녔지만 곤궁하게 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고 탄식했던 사마천이 ‘적극 행정’보다 ‘보신’을 우선시한 이들을 곱게만 볼 리는 만무했다.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에 ‘마(馬)’자를 한 획 빼고 쓴 것엔 전전긍긍하면서도 “(관료로 재직하는 동안) 잘못을 바로잡는 말은 황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사기>의 저자가 꼬집었던, 꼴불견의 관료 군상이 요즘 세상이라고 없을까. 기획재정부부터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까지 19개 주요 정부 부처 수장 이름을 나열한 뒤 각 부처가 내건 주요 정책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봤다.2000여 년 전보다 좋아졌다고 선뜻 자신하기 힘들다. 대다수 국민에게 장관들은 이름과 얼굴 모두 낯설다. 각 부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의 몇 마디 말을
알베르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방인>을 냈다. 첫 한국어 번역본은 이휘영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가 6·25전쟁 중인 1953년 청수사(靑樹社)에서 펴냈다. 전쟁 중에 쓰인 책이 전란 중에 다른 언어로 옮겨진 데는 그 시대만의 이유가 있을 터다. 흔히 ‘외부 사람’ ‘국외자’로 번역되는 ‘에트랑제(tranger)’의 역어(譯語)로 일상에서 사용이 드문 ‘이방인(異邦人)’을 택한 데서도 일본 문화의 잔향이 남은 시대상이 엿보인다.시대의 무게는 책의 제목보다, 첫 문장 번역에서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라는 리드문을 두고 이 교수는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로 옮겼다. 곧이어 등장하는 전보의 문구도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儆白).’으로 예스럽다.같은 문장을 1994년 이 교수의 제자인 김화영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보다 원의에 가깝게 번역했다. 모친의 별세를 두고 ‘어머니’와 ‘돌아가셨다’라는 경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950년대 스승이 직면했던 사회적 제약을 떨쳐낸 것이다. 김 교수 이후 번역가들은 부고에 등장하는 ‘경백’이란 표현마저 ‘근조(謹弔)’(김화영), ‘삼가 애도함’(김예령), ‘삼가 조의’(이기언) 등으로 시대에 맞게 바꿨다.이처럼 언어는 시대의 모습을 담을 수밖에 없다. ‘번역가의 종말’을 선포한 오늘날 인공지능(AI) 번역기들은 카뮈의 첫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는 모두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라는 다
“오랜 시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보다 왜 나은지,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논의가 부족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지식인들이 근본적인 성찰을 할 때입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러시아 대사)는 지난 3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인간에 대한 교육, 인문교육을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내 1호 러시아사 박사(미국 하버드대)로 고려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이 명예교수는 여성 1호 대사(핀란드·러시아)와 KBS 이사장,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등을 거쳤다. 대표적인 보수 인사로 꼽히는 그는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4·10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을 거뒀습니다. 여당의 패배가 아닌 보수의 위기, 자유주의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옵니다.“보수나 진보 같은 낱말들은 (원뜻과 달리 오용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보수라는 용어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력’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플라톤의 <국가>에는 가장 바람직한 정체(政體)로 ‘아리스토크라티아’가 거론된다. ‘귀족’을 뜻하는 영어 단어 ‘aristocracy’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크라티아를 ‘귀족정’으로 옮긴 탓에 원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원래는 ‘최선자들의 지배’(the rule of the best)라는 의미다. ‘좋다’라는 뜻의 희랍어 ‘아가토스’의 최상급 표현 ‘아리스토스’와 ‘지배하다’는 의미를 지닌 ‘크라테인’의 합성어다. 혈통은 물론 능력과 품성에서 최고의 리더가 이끄는 것을 최선의 정치 체제로 봤던 것이다.플라톤은 아리스토크라티아가 타락하면 순차적으로 과두정(올리가르키아), 민주정(데모크라티아), 참주정(티라니스)의 형태를 취한다고 봤다. 사치품 같은 불필요한 것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거세지고, 이런 요구를 다루는 정부 기능이 비대해지면서 ‘훌륭한 나라’(아가테폴리스), ‘아름다운 나라’(칼리폴리스)는 고름이 부풀어 오른 듯한 ‘염증 같은 나라’(플레그마이누사폴리스)로 전락한다. 플라톤에게 정치 퇴화의 종착역인 참주정은 ‘말기적 질병’으로 불렸다. 현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자면 포퓰리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저열한 정치 체제가 힘을 얻는다고 본 것이다. 서구 정치학의 첫 장을 차지한 것은 ‘정치의 타락’에 대한 경고였다.가장 훌륭한 자가 국가를 이끌 것인가, 아니면 다수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것인가는 정치 철학의 영원한 난제였다. ‘가장 뛰어난 자’(호이 아리스토이)의 리더십으로 대변되는 스파르타, ‘군중’(호이 폴로이)의 민의(民意)를 앞세운
“한국의 대(對)중국 외교가 지닌 큰 문제점은 사용하는 정책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국의 패를 훤하게 읽고 있고 정권별 맞춤형 대응책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서울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난 이민규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사진)의 목소리엔 확고한 원칙 없이 펼치는 대중 외교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최근 중국 대외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 기조를 분석한 <국가핵심이익>을 출간한 이 연구위원은 베이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중국 외교 분야 전문가다. 미·중 관계와 한·중 관계, 중국의 대외정책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다.이 연구위원이 포착한 ‘국가핵심이익’은 중국이 대외 정책에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소위 ‘마지노선’으로 삼고 있는 최상위급 국가이익을 의미한다. 장쩌민 전 주석 시기부터 공식 석상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후진타오, 시진핑 체제를 거치며 구체화했다. 옌쉐퉁 칭화대 교수가 ‘인민의 생명과 안전, 국가 정치제도와 경제생활의 장기적인 안정과 관련한 생존이익’이라고 이론화 작업을 마쳤다.이 연구위원은 “구체적으로 중국의 국가핵심이익은 대만·홍콩·마카오·티베트·신장을 포함한 국가 주권, 핵무기를 축으로 한 국가안보, 데이터 주권 등 신전략산업을 다루는 국가발전이익으로 이뤄진다”며 “중국과 외교적으로 협상할 때 어떤 이슈가 국가핵심이익과 연결되는지를 살펴서 회피할 것은 피하고 지렛대로 활용할 것은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중국은 글로벌 차원의 대원칙을 마련해 대외 정책을 운용하는데, 한
적지 않은 일반인들이 역사라는 단어를 들을 때 고대 문명을 떠올린다. 학계에선 이미 낡은 용어가 된 ‘4대 문명’이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는 이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실제로 접할 수 있는 소위 4대 문명에 대한 정보는 피상적이다. 한국에서 근대 역사학이 이식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세계사의 첫 시작은 한국 학계에선 ‘공백 지대’다. <이집트에서 중국까지: 고대문명 연구의 다양한 궤적>은 고대 이집트와 근동, 고대 인도와 중국 전문가들이 쓴 해당 지역 연구사 서적이다. ‘세계 고대문명 연구를 향한 전초기지’를 자처하면서 2020년 설립된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모은 출판물이다. 현대인에겐 암호와도 같은 이집트 성각문자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으로 쓰인 1차 사료를 해독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여했다. 비전문가의 중역(重譯)을 거쳐 접하던 그저 그런 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대 문명의 참모습을 접할 수 있다. 다만 책은 해당 지역 역사에 대한 개설이나 문화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다소 낯선&n
이집트에서 중국까지: 고대문명 연구의 다양한 궤적김구원·김아리·심재훈 외 지음 / 진인진382쪽 | 3만원적지 않은 일반인들이 ‘역사’라는 단어를 들을 때 ‘고대 문명’을 떠올린다. 학계에선 이미 낡은 용어가 된 ‘4대 문명’이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는 이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실제로 접할 수 있는 소위 4대 문명에 대한 정보는 피상적이다. 한국에서 근대 역사학이 이식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세계사의 첫 시작은 한국 학계에선 ‘공백 지대’다.<이집트에서 중국까지: 고대문명 연구의 다양한 궤적>은 고대 이집트와 근동, 고대 인도와 중국 전문가들이 쓴 해당 지역 연구사 서적이다. 세계 고대문명 연구를 향한 전초기지’를 자처하면서 2020년 설립된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모은 출판물이다.현대인에겐 암호와도 같은 이집트 성각문자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으로 쓰인 1차 사료를 해독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여했다. 비전문가의 중역(重譯)을 거쳐 접하던 그저 그런 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대 문명의 참모습
2019년 11월 18일.일본 도쿄 그랜드프린스호텔다카나와에서는 초대형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네이버 자회사인 라인과 소프트뱅크그룹 산하 일본 포털업체인 야후재팬이 경영 통합에 나선 것을 공식화했던 것입니다.라인과 야후재팬 운영사인 Z홀딩스는 두 회사 경영을 통합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체결하고, 언론에 향후 구상을 대대적으로 밝혔었습니다.이데자와 다케시 라인 대표와 가와베 겐타로 Z홀딩스 대표는 이날 각각 상대 회사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그들은 “지금까지는 두 회사가 라이벌이었지만 큰 결단을 내렸다”며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AI) 기술 기업이 되는 게 목표”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회사는 통합 이후 매년 1000억엔(당시 환율 기준 약 1조698억원)을 AI 분야에 투자할 계획이었습니다.이데자와 대표는 “최강의 원팀이 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됐다”며 자신있어했습니다.그랬던 두 회사의 ‘동거’는 채 5년을 가지 못했습니다.일본 총무성이 앞장서 네이버와의 정보기술(IT) 인프라 위탁 관계를 끊은 데 이어 네이버의 라인야후 지분 매각을 압박하고 나섰습니다.네이버 출신으로 라인을 개발한 신중호 최고프로덕트책임자(CPO)는 라인야후 이사회에서 제외됐습니다.일본 소프트뱅크는 속전속결로 네이버가 보유한 A홀딩스 지분 일부를 7월 초까지 사들이겠다고 밝히고 나섰습니다.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기업 지분을 두고 외국 정부가 나서서 조정하라 말라 나서는 데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구축한 해외 플랫폼이 물거품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기 직전입니
때로는 글자 한 자,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일이 발생한다. 서구 종교·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벌어졌던 ‘이오타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희랍어(고대 그리스어) 단어 ‘호모우시오스’(동일한)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한)는 영문자 아이(i)에 해당하는 희랍어 철자 이오타(ι)가 있고 없고만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미세한 차이는 예수가 ‘신과 동일한’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인지, 아니면 ‘신과 유사한’ 인간에 불과한지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스펠링 하나를 두고 ‘정통’과 ‘이단’,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데이터 외면한 결정흔히 무지몽매하다고 치부되는 고대 세계에서도 이처럼 작은 차이를 두고 존망을 건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합리성의 시대라는 현대에 객관적 근거가 무시되고, 팩트가 배제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지난달 22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이 소위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 개혁안(소득보장안)의 손을 들어주는 과정도 그랬다. 구체적 숫자에 기반한 경제와 재정의 논리는 들어설 틈이 없었다.시민대표단이 선택한 ‘소득보장안’은 보험료를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생애소득 대비 노후연금 비율)을 40%에서 50%로 올리는 게 골자다. 이 안을 적용하면 기금 소진 시기를 2055년에서 2061년으로 고작 6년 늦출 뿐이다. 향후 70년간 누적 적자가 오히려 702조원 더 늘어난다. 2078년 미래 세대는 소득의 43.2%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전형적인 조삼모사식 개악이다.어떻게 이런 결론이 다수결
주요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잇따라 치킨 가격을 인상하고 나섰다. 지난 15일 굽네는 배달 수수료와 인건비, 임대료 상승을 이유로 대표 메뉴인 '고추바사삭' 등 9개 치킨 제품 가격을 일제히 1900원씩 인상했다. 굽네가 가격을 올린 것은 2022년 이후 2년 만이다. 치킨·버거 브랜드인 파파이스도 2년여 만에 가격을 올렸다.지난해 4월에는 교촌치킨이, 12월에는 bhc가 주요 제품 가격을 3000원 올렸다. 앞서 BBQ는 2022년에 주요 제품 가격을 2000원 인상했다.한때 '서민 음식'으로 불렸던 치킨에 부담스런 가격이 책정된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각종 닭고기 상품에는 공통점이 있다.바로 닭이 부위별로 분리돼 요리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닭 한 마리가 통째로 식탁 위에 오르는 광경이 적지 않았지만, 어느 때부턴가 다리나 날개, 가슴살 식으로 분리된 형태의 닭고기가 친숙하게 됐다.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래서 별도로 의식하기 힘든 이 같은 현상을 두고 20세기 초 저명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손쉽게 표현하자면 닭의 원래 형태를 알기 힘든 오늘날 ‘치킨’이 닭이 양반다리 하고 앉아있는 삼계탕 보다 보다 ‘문명화된’ 음식이라는 식의 주장을 폈던 것이다.엘리아스의 저서인 <문명화 과정>에 따르면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고기 요리를 대하는 서구인들의 태도도 큰 변화를 겪었다.그 흔적은 서구사회의 각종 예의범절의 변화와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중세 서양 상류층 식탁에선 요리가 된 동물의 전신이 그대로 올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나 송아지처럼 동물의 전신이 그대로 식탁 위에 오르기 힘든 경우는 그 동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에 즈음해 자신의 친위부대인 히파스피스테스에게 은으로 장식된 방패를 나눠줬다. 이들은 이후 ‘은방패 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아버지 필리포스 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 가문과 동고동락한 은방패 부대는 단연코 최강의 부대였다. 그들의 창과 방패 아래 페르시아 제국이 쓰러졌고, 세계 정복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수많은 실전 경험과 승리에 대한 기억으로 단련된 이들의 위용은 노년이 돼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인 기원전 317년. 오늘날 이란 가비에네에서 마케도니아 장군들 간의 후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주로 70대로 구성된 은방패 부대가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했다. 로마 시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은방패 부대는 나머지 병사들이 쓰러졌을 때도 똑바로 대열을 맞춰 전장을 누비며 저항하는 자를 모두 쓸어버렸다”고 그들의 노익장을 묘사했다.고대의 은방패 부대에 비견되는 집단이 현대 한국 사회에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로 통칭되는 50대 중반~60대 중반 그룹이다. 은방패 부대가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듯 86세대는 무소불위의 군부 정권에 맞섰다. 마케도니아 군단이 거침없이 이집트와 인도까지 밀고 들어갔던 것처럼 86세대는 정치·경제·문화·사법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이 청년기부터 노년까지 쉼 없이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것과 같이 대학생 시절부터 ‘어른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백발이 성성해졌어도 한국 사회의 주인공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다.야당의 기록적인 압승으로 끝난 22대
1945년 3월 19일 독일의 패망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네로 명령(Nerobefehl)’이라고 불리는 ‘자기파괴 명령’을 냈다.“독일 내 모든 군사적 교통수단, 방송 장비, 산업시설과 생활 관련 시설들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즉시, 혹은 가능한 한 단시간 내에 파괴하라”는 것이었다.이 같은 자살·자폭 명령은 1945년 3월 이후까지 독일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일부 지역에서 거침없이 수행됐다.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을과 도시를 사수하다 죽어라’라거나 ‘무기를 손에서 놔선 안 된다’라는 비이성적인 명령이 잇따랐다.비합리적 명령에는 도시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은 사살하라는 내용도 포함됐다.히틀러의 비이성적인 명령에 열렬히 따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지 않았다. 여전히 독일 내 상당수 지역에서 총통의 명령은 최고의 규범이었다.나치당과 SS, 열렬한 나치 추종자들은 ‘파괴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6주간에 걸쳐, 적군의 폭격과 포격이 파괴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부숴버렸다.그들은 또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반대하는 자, 태업하는 자들에 대해 총살형과 교수형을 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수 주에 걸쳐 독일인들은 한편으론 적군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론 자국 정부 기관에 의해 조국이 타오르는 모습을 봐야 했다.‘네로 명령’에 앞서 2월 20일엔 제국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유대인이 관련된 독일 내 모든 문서(비밀문서이거나 다루기 까다로운 모든 문서)를 조직적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어떻게 이렇게 극단적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개인은 무례하고, 국가는 무도하다.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언행, 안하무인 방식은 비즈니스건 외교건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 중국 얘기다.<불통의 중국몽>은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인 저자가 중국의 전방위적인 ‘영향력 공작’ 실상을 전하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한국의 칼날을 무디게 하기 위해 중국은 한국 사회 속 친중 세력을 적극 활용한다. 친중 세력은 △한반도 통일을 중국이 지지하며 △북한의 비핵화에 중국이 협력하며 △거대 중국 시장은 한국 경제의 목숨줄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중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의 폐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중국의 ‘갑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극중팔계(克中八計)’를 제시한다. 외국의 간첩 활동 등을 다루는 국내법을 정비하고, 이적 개념을 정비할 것을 주문한다. ‘사이버 안보법’을 제정하고 우리의 국가 주권을 존중할 것을 분명히 한 대중국 외교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언제까지 한국은 중국에 약점을 무방비로 드러내고 있을지, 언제까지 중국에 휘둘리기만 할지 저자가 던진 질문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김동욱 오피니언부장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개인은 무례하고, 국가는 무도하다.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언행, 안하무인 방식은 비즈니스건 외교건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 중국 얘기다. 중국은 ‘말이 안 통하는’ 나라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지 쇄신을 위한 방책으로 국제사회가 수용할만한 가치를 갖추는 ‘정공법‘ 대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한 영향력 확대라는 ‘사술’을 동원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불통의 중국몽>은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인 저자가 중국의 전방위적인 ‘영향력 공작’ 실상을 전하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이런 중국의 ‘공작’ 대상에 당연히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구워삶기에 필사적이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14개국 중 사회주의 체제 경험을 공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의 방어선이라는 ‘제1도련선’ 안쪽 중심부에 주한미군이라는 치명적 존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칼날을 무디게 하기 위해 중국은 한국 사회 속 친중 세력을 적극 활용한다. 친중 세력들은 △한반도 통일을 중국이 지
증기 기관이 최초로 상업화한 해는 1712년이었다. 하지만, 증기 기관이 경제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증기 기관 도입 후 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결과, 영국의 1인당 총생산 증가가 눈에 띄게 가속화된 것은 1830년대 이후였다.마찬가지로 전구는 1879년에 발명되었지만, 미국에서 생산성 향상 추세가 가속화된 것은 그로부터 50년 이상 지나서였다.기술 혁신은 빠르게 진행됐지만, 신기술이 삶 속에 녹아들고 삶을 바꾸는 데에는 시차가 있었다.프랑스의 경제학자 필리프 아기옹의 역저 <창조적 파괴의 힘>에는 이처럼 기술이 일상에 미치는 '시차' 문제를 다룬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대표적인 것이 컴퓨터의 영향이다. 1987년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통계에만 없을 뿐 여기저기에서 컴퓨터가 보인다”고 지적했다. ‘솔로의 모순’이라고 불리는 이 말이 나왔을 당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한 지 18년이나 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들은 기술 혁신이 생산성 향상에 미치는 여파를 느끼지 못했다.정보 통신 기술과 관련한 경제 성장의 물결은 그보다 수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그 물결은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이런 '시차 현상'은 전기 보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기가 지닌 엄청난 변화 가능성을 엔지니어들이 이미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1899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은 전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는 “19세기 말에 전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점과 20세기 말 정보통신(IT)기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점을 평행선상에 놓고 비교해야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페데리고의 매’(Federigo's Falcon)를 꼽을 수 있다. <데카메론> ‘다섯째 날 아홉 번째’ 이야기인 이 에피소드는 ‘기사도적 사랑’을 그린 중세적 가치를 다루고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나’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현대 문학 작품이 떠오를 정도로 반전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한 귀족 부인을 사모해 “가산을 탕진한”한 ‘지고지순한’(?) 사나이의 러브스토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탈리아 피렌체에 페데리고라는 청년이 살았다. 그는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인 조반나(모나 조바나)를 짝사랑했다. 조반나 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는 창 시합과 무술대회를 자주 개최했다. 걸핏하면 성대한 무도회를 열어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 돈을 아끼지 않고 온갖 아름다운 보석과 선물을 마련해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모만큼 절개가 굳은 조반나 부인은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그 남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속된 선물과 잔치로 재산을 탕진한 페데리고는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단인 작은 농장과 진기한 매 한 마리만 수중에 남게 됐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매 사냥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조반나 부인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는 우연히 페데리고가 사는 곳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됐다. 조반나 부인의 어린 아들은 시골에서 여기저기 뛰어놀다가 페데리고가 진기한 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아들은 매를 갖고
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桑弘羊)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인 출신답게 상홍양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상공업과 무역을 중시한 인물이었다.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적인 내용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도 정치의 중점이 경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수요가 급증했다.국가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농민들에게서 쥐어짤 수 있는 한도만큼 세금을 쥐어짰다는 것이 문제였다.이에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와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국고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게 세상사였다.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70여만 명의 농민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뒀다.산민전은 돈이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발적으로 자산을 신고하게 해서 2민(緡, 1민은 1000전(錢))당 10%,
‘당나라 군대’.흔히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했다는 당나라의 군대가 규율 없고 군기가 빠진 병졸들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당나라군이 고구려·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부터 청일전쟁,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을 비하해 부른 말에 뿌리가 있다는 해설까지 다양한 주장이 인터넷을 떠돌지만 확실한 어원이 밝혀진 것은 없는 듯하다.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상 실재했던 당나라군은 '유약한 군대'로 단순히 깎아내리기 어렵다는 점이다.남아있는 자료가 중국 측 자료 일색이어서 왜곡의 소지가 적지 않지만, 고구려 역사상 최대 패전 중 하나로, 흔히 주필산(駐蹕山)전투로 불리는 안시성 회전에서 고구려군의 참패를 불러온 것은 당나라 군대의 일사불란한 규율이었다.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침공군을 조직해 요동 지역을 침입한다. 대(對)고구려전에 투입된 당군의 전체 군세는 (고구려에 패해 당 태종의 명성에 누를 끼친 탓에) 명기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20여만명으로 추산된다.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압도적 군사적 역량으로 제압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인근에서 고구려 주력부대와 대면하게 됐다.북부 욕살(褥薩) 위두대형(位頭大兄)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대형(大兄)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15만명에 달했다. 이들 고구려 중앙군은 전국 각지의 성에서 차출한 병력과 휘하 말갈족의 여러 부족에서 동원한 병력을 합친 것이었다.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이는 고구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전투에 앞서 열린 전략회의에서 경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년)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갖기로” 마음 먹었다.하지만 유럽의 변방이던 당시 잉글랜드에선 제대로 된 대포를 만들 인력도, 기술도 없었다. 최고의 대포는 독일제로 아우크스부르크의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크의 자틀러 공장에서 제조되는 것들이었다. 독일의 대포 주조업자들은 정확하면서도 바퀴 네개짜리 마차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대포를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군사기술 분야에서 크게 낙후돼 있던 영국은 대륙의 장인들에게 대포 제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헨리 8세는 플랑드르의 장인이었던 한스 포펜루이테르에게 대포 생산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만든 ‘미친 마거릿(Mad Margaret)’이라는 이름의 대포는 길이가 5.5m, 구경 54cm에 무게가 무려 15t에 이르는 대형포로 명성이 자자했다.하지만 잉글랜드에서도 1541년 대포 제조에 있어 중요한 발전이 이뤄진다. 바로 성직자 윌리엄 레베트가 애시다운포트리스트에서 자체적으로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철제 대포는 깨지기 쉽고 대단히 무거웠을 뿐 아니라 청동 대포보다 정확도도 떨어졌다. 게다가 크게 만들기도 어려워졌지만 대신 각 지방의 군소 대장간에서 싼 가격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결국 철제 대포 생산에 주력한 잉글랜드는 얼마 안가 철제 대포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1574년이 되면 너무나 대포가 많이 수출된 탓에 정치가들이 대포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를 지경이 된다.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철제 대포 생산을 본격화하던 1550년대 시점에도 잉글랜드에선
초기 러시아 사회에서 남자 노예는 홀로프(холоп), 여자 노예는 라바(раба)라고 불렸다.12세기에 편찬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에 따르면 이들 노예의 지위는 비참했다.제대로 된 처우는 꿈도 못꿨다. 노예가 자유민을 구타했을 경우 얻어맞은 자유민은 그 노예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 노예를 살해하더라도 형사상의 벌인 ‘살인 배상금(비라·вира)’이 전혀 없었다. 소유주인 주인에게 ‘재산에 가한 손해’ 때문에 적은 액수의 벌금만 지불했을뿐이다.반면 상급친위대원(크냐지 무쥐·княжи мужи)을 살해하면 보통보다 두 배나 무거운 살인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이처럼 비참한 존재인 노예에서 파생된 단어가 ‘라보타치(работать)’라는 표현이다. 현대 러시아어에서 '일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그런데 고대 러시아어에서 ‘라브(раб·교회관계 고문헌에 간혹 등장하는 남성 노예)’와 ‘라바’의 동사형인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현대 러시아어 ‘라보타치(работатъ)’가 의미하는 것처럼 ‘일하다’라는 뜻이 아니었다.농사일로 대표되는 힘든 노동이란 뜻은 ‘스트라다치(страдатъ)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대신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주인에 대한 노예의 관계’나 ‘고용 관계로 일하는 노예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이는 같은 슬라브어 계열인 체코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20세기 초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는 체코어 ‘라보타(r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은 오랫동안 독일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한 때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나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우토반을 건설했어”라는 말은 독일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그리고 그 같은 상징의 생명력은 질겼다. 현대 독일 안팎에서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건설해 경제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식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기도 하다. “총통께서 길에다 실업을 묻어버렸다”는 나치의 선전 문구는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상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때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오늘 우리가 그 위를 달린다.(Es sind auch Autobahnen gebaut worden damals, und wir fahren heute drauf.)”는 표현은 이 같은 감정이 잘 녹아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무엇보다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 왔다.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 기반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강력한 투자 프로그램에 따른 경기 대처라는 케인스식 불황 대처법이 행동으로 옮겨진 케이스로 꼽혀왔던 것이다. 당대에 독일 내외에서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 불렸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아우토반을 둘러싼 이 같은 이미지들은 대부분 허구의 ‘신화’에 기초했던 점이 적지 않았다.우선 아우토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부터 히틀러나 나치 정권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고속도로 건설
“그(파리스)는 여신들이 그의 외양간에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던 것이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24권 중에서)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 얘기가 등장하지 않는다.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과’와 ‘가장 아름다운 여신 선택’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신화의 내용은 호메로스 생존 당시 청중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그저 작품 막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는 장면에 가서야 “여신들이 파리스를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다”는 짤막한 언급이 나올 뿐이다.파리스의 사과를 포함에 서구 사회에서 ‘사과’를 둘러싼 유명 에피소드로는 <성서> 속 ‘아담과 이브의 사과’, 독일의 문호 쉴러의 <빌헬름 텔>에 등장하는 ‘빌헬름 텔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이들 4가지 ‘사과 에피소드’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점이다. 종교적 믿음 혹은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그런데도 각종 에피소드 속에서 ‘사과’가 전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던지자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3여신이 경쟁에 나섰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았다는 ‘파리스의 판정’ 에피소드
오랫동안 문신은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행위였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조폭’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병역의무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론되던 ‘특이한 행동’으로 치부됐다. 문신을 하는 것은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예전부터 문신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었던 것일까? 의외로 한국 사회 초기 모습을 담은 기록에 ‘문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들은 한반도 남부 지역의 모습을 그릴 때 문신에 관한 기술을 반복적으로 남겼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조금씩 표현을 달리해가며 한반도의 문신문화를 전한다. 기록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其男子時時有文身)”(<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중 한(韓) 관련 부분) “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男女)가 문신(文身)을 하기도 한다.(男女近倭, 亦文身)”(<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중 진한(辰韓) 관련 부분)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한(韓) 관련 부분)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國近倭, 故頗有文身者)”(<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한(韓) 관련 부분) 특히 중국의 관찰자들은 문신 습속을 왜(倭)와 관련이 높다고 단언
영조 41년(1765년) 윤이월 23일 밤,영조가 직접 경희궁 흥화문 밖으로 나섰다. 궁궐 입직 당번이 만류했다. “깊은 밤중에 왕이 직접 궁궐 문을 나서는 것은 국체를 손상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영조는 그 자리에서 옥당관(玉堂官·입직 당번)의 벼슬을 박탈하고 흥화문으로 행차했다.그곳에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심정최와 윤희복이라는 두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문의 명예를 건 소송전을 치열하게 진행해 오던 중이었다.영조는 명망가 출신들이 지리한 소송을 계속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데 진노했다. 두 사람을 친히 심문하고는 형장(刑杖)을 가한 뒤 유배형을 명했다.일흔살이 넘은 두사람은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을 갖고, 그중 윤희복은 며칠 뒤 사망했다.두 사람이 목숨을 건 소송전을 불사한 이유는 조상의 묏자리 때문이었다.이후 250년을 끈 묘지 소송,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산송(山訟·조상의 묘지를 둘러싼 소송)의 시작이었다.조선 시대 묘지 소송사를 상세히 다룬 <조선의 묘지 소송-산송, 옛사람들의 시시비비>(김경숙)라는 책에 따르면 국왕까지 개입한 초대형 쟁송의 시작은 파평 윤씨의 '조상 찾기'에서 시작됐다.고려시대 재상을 시낸 윤관의 후손들인 파평 윤씨들은 고려·조선 초에 사라진 윤관의 묘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조선 중기 이후 부계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고 사라진 원대 조상의 분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계 의식 강화되면서 수면 위로 나타났던 것이다.파평 윤씨들은 윤관의 묘가 경기도 파주의 분수원에 있다는 옛 기록에 근거해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묘갈(墓碣·
거울은 오랫동안 존엄하고 높은 자를 상징하는 물품이었다.동아시아 고대 사회의 청동거울부터 프랑스 절대 왕조의 대명사 루이 14세가 건설한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까지 거울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했다.거울을 소유하고, 거울로 꾸미는 데는 실제 적잖은 권력이 동원됐다. 루이 14세는 ‘거울의 방’을 만들 당시 거울의 생산과 판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거울 제작 장인들을 협박하고, 뇌물로 매수해 화려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이 같은 거울은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초창기엔 단지 안에 물을 담아놓는 것에서 거울이 출발했다고 한다. 물에 비친 모습을 실내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실제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거울도 물을 담는 청동단지라는 주장도 있다.일부 지역에선 흑요석 같은 돌을 반질반질 닦아서 비친 상을 살펴보는 데서 거울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거울은 기원전 60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고원에서 등장했다. 화산폭발의 부산물인 자연산 유리인 화산유리(volcanic glass)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금속 표면을 닦아서 거울로 쓰는 것은 기원전 4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오늘날 일반적으로 거울이라고 지칭할 때 연상되는 유리에 금속코팅을 한 형태의 거울은 1세기에 근동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시대 박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 금박 판을 활용한 거울을 언급할 정도였다.로마 시대에는 거울의 사용이 널리 확산됐다. 호스티우스 콰드라라는 로마 시대의 기인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오목거울을 건물의 천장에
“길드의 장인 제조업자(동업조합 멤버)들은 자국 시장에서 그들의 경쟁자 수를 증가시킬 것 같은 어떤 법률에도 반대한다.(master manufacturers set themselves against every law that is likely to increase the number of their rivals in the home market.)”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폐쇄적인 길드 조직에 그 어떤 대상보다 강하게 시퍼런 날을 들이댔다.라이선스로 인한 시장 왜곡에 기대 과도한 이익을 얻던 이들이, 그들을 보호하던 장벽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기미만 보이면 강력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강력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각종 규제 뒤에 숨어 독점력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소수가 부당한 이득을 얻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큰 해악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때로는 감정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되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의 동업조합 구성원들은 나라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피로써 나라를 지키는 자에 비해 더 큰 공헌을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더 특별히 대우받을 이유도 없다”고 못 박은 게 대표적이다.그런 상황을 고치는 게 쉽지 않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시장 독점권을 줄이려는 시도는 강력한 무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한 군대를 감축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로 그려졌다. 군의 장교들이 군의 규모를 줄이는 데 반대하는 것과 동일한 열정과 일사불란함으로 동업조합 멤버들이 시장에서 경쟁자 수를 증가시킬 것 같은 법률에 반할 것이라고 묘사했다.폐쇄 시장의 문턱을 낮추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는 점도, 그들의 행위가 국가나 사회에 위협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동업조합자들은 과대 성장한 상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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