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택시를 자주 타는 관계로 내 안에 택시 이용 경험에 관한 꽤 많은 데이터가 쌓였다. 그 중 거의 틀림없는 공식이랄 게 있다면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택시를 탔는데 작은 볼륨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조용하고 쾌적한 운행경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클래식 FM으로 라디오 채널이 맞춰져 있다면 기대해도 좋다. 라디오 방송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특정 CD등의 음원이었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이다.
어쩌지, 택시 기사님이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었다
클래식 음악 덕후에 걸맞게도 기억에 남는 택시 탑승 기록 역시 클래식 음악과 관련있다.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도저히 집에 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택시를 탔다. 택시 내부는 아주 깨끗했고 기사분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간단한 행선지 확인과 함께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택시 안에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기교로 점철된 우람하고 복잡한 멜로디 덕분에 그 곡은 자정이 넘은 시간 라디오에서는 잘 편성되지 않는데, 기이했다. 잡생각도 잠시, 덕후답게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광활하고 장대한 오케스트라 멜로디에 바이올린이 존재감을 증폭해 멋짐이 폭발하며 1악장이 끝났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보통의 라디오라면 전 악장이 나오지 않고 1악장에서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클라리넷과 오보에의 몽환적인 연주로 2악장이 시작되었고 이윽고 바이올린의 매력적인 저음이 따뜻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아다지오 디 몰토, 매우 느리게 노래하며 피로를 달래주는 듯 다정하게 귓가에 다가왔다. 장대한 매력이 첩첩산중처럼 켜켜이 싸여있기에 목적지에 가까워진 것도 모른채 음악에 몰입했다.

3악장이 막 시작될 무렵 목적지에 도착해 운임을 치르고 하차해야 했다. 그 때 그간 별다른 말이 없었던 기사분께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손님, 오늘 음악이 마음에 드셨나요?”라고 여쭤보셨다. 수많은 택시 인생(?)에서 기사님께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단답으로 일관할지, 시벨리우스를 언급하며 ‘덕밍아웃'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잠깐의 머뭇거림에 기사님은 역시 조심스러운 말투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양성식이라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였습니다”라며 “오늘 다 못 들으신 곡은 나중에 제가 또 손님으로 모셔서 들으실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라고 덧붙이시고 미소를 지으셨다.

냉정한 덕후의 마음을 온돌처럼 따뜻하게 데워주는 이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가 당시의 음악감독이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함께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하는 여정이 담긴 다큐멘터리 '50번의 콘서트' 라는 영화다. 악단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아공의 소웨토 등을 돌며 콘서트와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영화는 한 단원이 택시에서 만난 기사를 비춘다. 그는 승객으로 만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단원에게 “길 위에서 존엄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저는 거친 길 위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듣습니다”라고 말한다. 단원은 감동해 눈물을 글썽인다.

이 영화 속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사님의 마음과, 양성식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CD 플레이어에 넣은 서울 기사분의 마음이 어딘지 맞닿아 있을 것으로 막연히 짐작해본다. 그러나 그 두분은 모르셨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 택시 기사분을 만난 로열 콘세트르허바우 단원에게도, 서울의 음산한 밤에 걸어갈 힘도 없어 택시를 잡아탄 나에게도 기억 속 가장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순간을 그분들이 길 위에서 직접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관련이 있다. 기사님은 오늘이 기사로서 택시를 운행하는 첫날이라고 밝히며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더듬더듬 입력하셨다. 그의 내비게이션 화면 한켠에 현재 재생중인 음악의 앨범 커버가 디스플레이되고 있었다. 덕후의 매서운 눈길에 포착된 앨범 커버에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앨범 상단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단어 “Emperor”. 황제는 못 참지! 은근히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닮은 듯한 그 기사분이 택시 위에서 스칠 거리들이 마냥 거칠지만은 않기를, 덕후로서 조용히 소망해 드렸다.

세 분의 기사님이 우주 어딘가에서 만나 클밍아웃을 하며 덕력 넘치는 대화를 하시는 장면도 가끔 상상해 본다. 아쉽게도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담긴 음반은 현재 구매하기 어려운 듯 하다. 또 '50번의 콘서트' 영화도 다시 볼 방법이 요원하다. 다음에 다시 그 기사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 음반의 구입처를 여쭤보고 싶다. 그리고 '50번의 콘서트' 영화도 추천해 드리고 싶다.